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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목표가 달라졌다: 결괏값보다 ‘설계도’를 그리는 아이가 생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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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목표가 달라졌다: 결괏값보다 ‘설계도’를 그리는 아이가 생존한다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AI교육팀장이미지 확대보기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AI교육팀장
‘5분 요약 유튜브’나 ‘완벽한 해설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아이는 화면 속 전문가가 쏟아내는 매끄러운 정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 명쾌한 풀이를 자기의 역량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는 뇌가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며 느끼는 일종의 인지적 착시일 뿐이다. 타인의 완성된 사유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공부가 끝났다고 착각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수고로움을 외면하는 지적 게으름을 경험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공지능(AI)이 내놓는 완벽한 결과물에 환호하는 상황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인공의 두뇌가 순식간에 추출한 매끄러운 최종안을 본인의 실력이라 여기며 ‘사고 정지’ 상태에 함몰된 우리 아이들. 과연 이 치명적인 오판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아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제 우리가 고수해온 교육의 지향점은 근본부터 재편돼야 한다. AI가 모든 지식의 완성본을 무상으로 배포하는 시대에 수치상의 성취는 더 이상 결정적인 변별력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사수해야 할 진짜 실력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논리적 궤적’에 있다. 최종 결론은 이미 흔해진 소모품이다. 이제 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고군분투하며 오판을 수정하는 과정은 오직 인간만이 내면화할 수 있는 독보적 자산이다.

생성형 AI는 지식의 생산을 자동화했지만, 지식 공간에서 ‘항해 능력’은 오히려 개인에게 더 강하게 요구된다. 프랑스의 미디어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피에르 레비(Pierre Lévy)는 기술을 매개로 인류의 사유가 증폭되는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역설하며 우리에게 ‘지식 공간’의 개척자가 될 것을 주문했다. 그에게 유의미한 것은 고착된 정보가 아니라 끊임없이 박동하고 연결되는 지적 흐름이었다. AI의 최종안을 무비판으로 수용하는 아이는 이 방대한 지식의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떠도는 표류자일 뿐이다. 반면 스스로 논리의 흐름을 구축하고 AI의 연산 체계를 재조립하는 아이는 공동체의 지성을 지휘하는 ‘지식 공간의 설계자’로 거듭난다. 기술에 사고를 양도한 아이는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만, 궤적을 장악한 아이는 기술을 도약판 삼아 지능의 정점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AI가 정답을 배달하는 시대, 아이를 사유의 주인으로 키우려면 집안의 공부 각도부터 조금 비틀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연습장에 문제의 최종 결론이라는 마침표를 찍기 전, 아이에게 ‘사유의 이정표(Cognitive Map)’를 그리게 하라. 하얀 여백에 결론부터 채우려 하지 말고,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어떤 원리를 소환하고 어떤 위계로 접근할지 아이만의 기호와 선으로 경로를 시각화하는 것이다. 이때 지도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여백에 ‘가정’ ‘근거’ ‘추론(계산)’ ‘검증’ 네 칸만 만들고, 각 칸에 딱 한 줄씩만 채우게 하라. 마침표에 도달하기 전, 아이가 직접 그려낸 투박한 설계도가 쌓일 때 비로소 지능의 주권은 AI가 아닌 아이의 손에 더 가깝게 닿는다.

또한 부모는 수치에 집착하는 감독관의 위치를 내려놓고 논리의 파열음을 함께 추적하는 ‘러닝메이트’가 돼야 한다. '성적이 얼마니?'가 아니라 '여기서 논리가 어긋난 근거가 무엇일까?'라고 묻는 관점의 전환이 절실하다. 착오를 지워야 할 오답이 아닌, 궤적 수정을 위한 핵심 좌표로 수용할 때 아이는 비로소 세상을 비틀어 보는 통찰의 눈을 뜬다.

나아가 AI가 최단 거리의 직선 도로를 닦아줄 때, 일부러 아이와 함께 굴곡진 비포장도로를 산책해보길 권한다. 효율적인 완성본에만 매몰되지 않고 "이 기계적 논리 사이사이에 숨겨진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라며 질문의 틈새를 벌려주는 것이다. 매끄러운 표준 답안을 의심하며 자신만의 사유를 덧칠해본 아이는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지적 문장을 써 내려가게 된다.

이제 공부는 종착지에 일찍 도착하는 속도전이 아니라 종착지까지의 지도를 스스로 제작하고 그 여정을 장악하는 탐험이 돼야 한다. 지능이 자동으로 생성되는 AI 전성시대에 기계가 내놓은 결론만 탐하는 아이는 결국 기술의 소모품으로 소멸할 뿐이다. 아이가 스스로 궤적을 그려나가는 사유의 통로를 열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거센 기술의 파고 속에서 아이를 지켜낼 가장 단단한 지적 방벽이다.

박희준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acklond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