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美, 러시아군 '전쟁범죄' 규정에도 푸틴을 '전범'으로 몰지 않은 이유는

미국 정부가 2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는 미국이 앞으로 러시아의 전쟁 범죄 행위에 관한 정보와 증거를 수집해 이를 국제사법재판소(ICJ) 또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출함으로써 러시아를 기소하고, 처벌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전범’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러시아군 관계자를 전쟁 범죄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평화협상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우선 전쟁 범죄를 저지른 책임자인 ‘개인’을 제외한 채 ‘러시아군’의 전쟁 범죄만을 고발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미국은 러시아의 범죄 행위 증거 수집을 계속하면서도 푸틴 대통령을 국제적인 법정에서 기소하는 방안을 일단 유보해 두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미 푸틴 대통령을 전범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향후 우크라이나 사태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군 책임자를 비롯한 개인에 대한 책임을 묻을지 최종적인 결정을 할 것으로 보인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공개되거나 첩보로 입수할 수 있는 정보를 신중하게 검토한 결과를 토대로 전쟁 범죄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모든 혐의가 있는 범죄처럼 그 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 법정이 특정 사건에 대한 형사 책임을 밝히는 궁극적 책임이 있고, 우리는 형사 기소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 책임을 묻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곧 미국 정부가 러시아군의 전쟁 범죄 행위를 국제적인 법정에 고발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줄곧 러시아의 전쟁 범죄 및 잔혹 행위에 대한 실태 파악 및 관련 자료 수집을 하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미국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 있는 한 산부인과 병원에 무차별 폭격을 가해 산모와 신생아가 사망한 사례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대피소로 사용한 마리우폴 극장을 폭격해 무고한 시민이 다수 사망한 사례 등을 대표적인 전쟁 범죄 행위로 규정했다.

블링컨 장관은 성명에서 “러시아군이 아파트, 학교, 병원, 인프라, 민간 차량, 쇼핑센터 구급차를 파괴하고 있으며 수천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고 지적했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미국 정부가 러시아군의 잔혹 행위를 전쟁 범죄로 규정하기에 앞서 우크라이나 정부 및 유럽 국가들과 긴밀히 협의했다고 밝혔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또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지도자들의 행동에 대한 조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해 이들에 대한 고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유엔 총회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이후 미국과 44개국은 유엔 인권위원회 산하에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해 러시아의 전쟁 범죄 행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러시아는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16일 푸틴 대통령을 ‘전범’으로 규정하자 ‘미·러 관계 단절’ 위협을 하면서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21일(현지시간) 발표한 보도문을 통해 “국가 최고위급에 어울리지 않는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러·미 관계를 단절의 경계에 처하게 할 것임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수년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을 폭격해 온 국가 원수가 이런 발언을 할 권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미국 정부가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쟁 범죄로 규정함에 따라 국제형사재판소(ICC) 등이 러시아의 전쟁 범죄 행위를 심판하는 절차에도 탄력이 붙을 수 있다. ICC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범죄와 반 인류 범죄가 자행됐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며 신속하게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형사재판소(ICC)와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전쟁 규칙을 근거로 전쟁 범죄를 판단한다. ICJ는 국가 간의 분쟁에 대해 판결을 하고, 개인을 기소하지는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ICJ에 제소했다. ICJ가 러시아에 패소 판결을 하면 그 집행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맡는다. 그러나 러시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ICC는 개별 국가의 법정에 세울 수 없는 개인 전범을 조사하고 기소하는 역할을 한다. 개인이 전쟁 범죄를 저지른 증거가 있다면 ICC 판사들이 그들을 재판에 회부하고, 체포 영장 발부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ICC에는 자체 경찰력이 없어 용의자를 체포하려면 각국 정부에 의존해야 한다. 러시아는 ICC에서 2016년에 탈퇴해 더 이상 회원국이 아니다. ICC의 요청이 있더라도 러시아 정부가 푸틴 대통령의 인도에 응하지 않을 게 확실하다.

러시아는 바이든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을 전범이라고 규정한 것을 러시아의 정권 교체를 추진하려는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등을 전범으로 부르면 한결같이 이들을 권좌에서 쫓아내기 위한 노력이 뒤따랐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