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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포스트 팬데믹 시대 근무시간 외 업무 연락 금지 국가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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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포스트 팬데믹 시대 근무시간 외 업무 연락 금지 국가 급증

재택근무 확산과 직장인 번아웃 등으로 노동자 권익 보장 강화 움직임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직장인의 쉴 권리가 핵심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MSNBC이미지 확대보기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직장인의 쉴 권리가 핵심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MSNBC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이후 근무시간 이외에 업무와 관련된 전화, 이메일, 문자메시지 등의 발송을 법으로 금지하는 국가가 증가하고 있다. 2일(현지 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팬데믹을 계기로 원격 근무 체제가 널리 확산하면서 직원들의 번아웃을 막기 위해 근무시간 이외에 직장 상사의 연락을 차단하는 게 중요한 이슈로 주목받았다. 주로 유럽 국가들이 근무시간 외 업무 연락 차단에 앞장서고 있으나 미국에서는 아직 이를 법으로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없다고 WP가 지적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국회에서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근로 시간 외의 전화 등을 이용한 업무 지시를 반복하는 등 근로자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이 법안은 문자메시지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의 수단을 명시하면서 이를 위반하면 5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했으나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제주도에서는 소속 공무원 상급자와 하급자 간 근무시간 외에 ‘카톡’(카카오톡) 등을 통한 업무 지시가 금지된다. 제주특별자치도는 공무원노동조합과 체결한 단체협약을 통해 지난해 말 이같이 확정했다. 이 협약은 ‘노력한다’라는 표현으로 명시됐지만, 앞으로 근무시간 외 ‘카톡’ 지시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재난이나 비상 상황, 주민 생활과 밀접한 긴급 상황은 예외다. 업무시간 외 회사 연락을 가장 먼저 금지한 국가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2017년에 직장인이 근무시간 이외에 업무 연락으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법으로 규정했다. 프랑스는 특히 주 35시간을 법정 근무 시간으로 정해 노동자의 쉴 권리를 보장했다. 그렇지만 보건 비상사태나 화재 발생 등의 경우에는 예외이다.

프랑스에 이어 이탈리아, 벨기에, 스페인,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이 근무시간 외 업무 연락 금지법을 제정했다. 그렇지만 ‘업무로부터 해방’에 관한 규정은 국가마다 차이가 있다. 벨기에는 공무원에 한해 이 법을 적용했고, 포르투갈은 10인 이상의 모든 직장에 이를 적용했다. 또 이 법을 위반하는 기업을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케냐 의회는 근무시간 이외에 업무 연락을 받는 근로자에게 시간 외 근무 수당을 주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는 지자체 차원에서 이를 보장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다. 호주 퀸즐랜드는 교사에 한해 ‘디지털 연락 해방’ 규정을 시행하고 있다. WP는 팬데믹으로 인한 피로와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게 더욱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직장인들이 자발적으로 퇴사하는 ‘대퇴직(Great Resignation)’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일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퇴직하지 않되 최소한의 일만 하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유행했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미국 내 자발적 퇴직자는 지난 3월 사상 최고 수준인 454만 명을 찍은 뒤, 4월 440만 명대를 기록하며 고공 행진 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5월까지 5개월 동안 약 2000만 명이 자발적으로 퇴사했다. 미국에서 지난해 자발적 퇴직자가 약 10년 전에 비해 2배가량 늘었다.

미국 소셜미디어(SNS)에서 최근 '조용한 사직'이라는 신조어가 큰 화제가 됐다. 이는 ‘허슬 컬처(hustle culture)의 상대적 개념이다. 허슬 컬처는 개인의 생활보다 일을 중시하고, 일에 모든 열정을 바치는 생활 양식을 뜻한다. 일부 젊은 직장인들이 자신의 업무 범위 이상으로 일할 때 승진이나 더 많은 급여, 더 많은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허슬 컬처를 거부하고 있다.

갤럽이 1만5091명의 미국 직장인을 대상으로 지난해 6월에 실시한 조사에서 자기 일에 열정적이라고 한 응답자는 3분의 1에 불과했다. 의도적으로 태업한다는 직장인은 20% 미만으로 나타났다. 두 그룹의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주어진 일을 최소한만 하면서 심리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멀어져 있다. 갤럽은 줄잡아 미국 직장인의 50%가량이 ‘조용한 사직’ 상태라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아직 업무시간 외 연락 금지 관련 법 추진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WP가 전했다. 뉴욕시 의회에서 지난 2018년에 근무시간이 지난 뒤에 업무 이메일이나 연락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조례가 제출됐으나 통과되지 않았다. 미국 정치권이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극명하게 양분돼 있어 노동자 권익 보장 이슈가 제기되지 않고 있다고 WP가 전했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