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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사우디, '석유 조정자' 대신 국익 선택…수요 부진 속 증산 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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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사우디, '석유 조정자' 대신 국익 선택…수요 부진 속 증산 강행

OPEC+ 6월 41만 배럴 추가 증산…세계 경제 둔화 '역주행'
'비전 2030' 자금 확보 우선…유가 변동성·지정학 위험 고조 우려
수요 감소 우려에도 국익을 우선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도로 OPEC+가 6월 원유 생산량을 일일 41만 1000배럴 추가 증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세계 경제 둔화 흐름 속에서도 시장 안정보다 생산량 확보에 무게를 둔 행보로 풀이된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수요 감소 우려에도 국익을 우선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도로 OPEC+가 6월 원유 생산량을 일일 41만 1000배럴 추가 증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세계 경제 둔화 흐름 속에서도 시장 안정보다 생산량 확보에 무게를 둔 행보로 풀이된다. 사진=로이터
세계 경제 둔화에 따른 수요 감소 우려에도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회원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플러스(OPEC+)가 또다시 대규모 증산에 나선다.

지난 4일(현지시각) 닛케이에 따르면 OPEC+ 자발적 참여국들은 지난 3일 온라인 회의를 통해 6월 원유 생산량을 일일 41만 1000배럴 늘리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지난 4월 합의한 5월 증산에 이은 추가 조치다. 전통적으로 국제 유가 안정을 위한 '조정자' 역할을 해왔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가 국익을 앞세워 수급 조절 역할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전후 구축된 국제 석유 시장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OPEC+ 자발적 참여국들은 4월부터 18개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행할 예정이었던 자발적 감산(일일 220만 배럴 규모) 축소를 불과 3개월 만에 44%나 달성했다.

석유는 단순한 상품을 넘어 국가 안보와 산업 기반을 지탱하는 전략 자원이다. 과거 사우디는 풍부한 매장량, 낮은 생산 비용, 막대한 잉여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시장 안정 역할을 수행했다. 유가가 급락하면 감산하고, 급등하면 증산해 가격을 안정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에는 장기적으로 석유 수요 이탈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과거 방식대로라면 사우디는 현재와 같은 수요 감소 국면에서 할당량 이상의 감산을 주도했을 것이다.
◇ '비전 2030' 자금줄 확보 최우선…저유가도 전략

그러나 사우디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여력이 없다는 평가다.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대규모 탈석유 경제 개혁 '비전 2030' 실현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자국의 희생을 감수하며 다른 산유국의 '무임승차'를 용인하기보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유가 하락이 오히려 사우디의 장기 전략에 부합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생산 비용이 높은 신흥 산유국이나 미국 셰일 기업들은 유가 침체가 장기화되면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 반면 배럴에 5달러 이하의 압도적인 저비용 구조를 갖춘 사우디는 경쟁자가 사라진 시장에서 잔존 이익을 독차지할 수 있다.

실제로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사우디 아람코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압박으로 투자를 망설이는 서구 기업들과 달리, 이산화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기술과 원유에서 직접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크루드 투 케미컬(Crude-to-Chemical)' 기술 등 친환경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며 기술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아람코는 2050년까지 간접 배출(스코프 2)을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 실질 제로 목표를 내세웠다.

미국의 태도 변화도 사우디의 전략 수정에 영향을 미쳤다. 셰일 혁명으로 중동 석유 의존도가 낮아진 미국은 과거와 달리 사우디의 안보를 적극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트럼프 행정부가 '드릴, 베이비, 드릴'을 외치며 증산을 독려한 데서 나타나듯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는 뚜렷하다. 이에 따라 미국이 사우디 안보를 지키고 사우디가 유가 안정을 책임지던 과거의 암묵적 합의는 약화하고 있다. 2019년 아람코 시설이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받았을 때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보복에 나서지 않은 것은 사우디에 큰 충격을 안겼다.

◇ '조정자 부재' 시장…유가 변동성 커지고 투기 우려

'조정자' 부재는 시장 변동성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유가 하락기에 증산했던 산유국들이 반대로 유가 급등기에는 공급을 줄여 이익 극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다른 금융시장에 비해 규모가 작은 석유 선물시장이 투기 자금에 의해 더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석유 소비국 처지에서 마냥 반길 수 없다.

세계는 석유 질서의 균열을 이미 여러 차례 목격했다. 2020년 사우디와 러시아의 '가격 전쟁' 당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 가격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저장 시설 부족으로 판매자가 돈을 주고 원유를 처리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10년대 중반 사우디와 미국 셰일 업계의 점유율 경쟁에 따른 '역오일 쇼크'도 시장 불안을 야기한 사례다.

석유 가격과 생산 정책은 산유국의 국가 운영과 직결된다. 과거 사우디의 증산에 따른 유가 폭락은 소련 붕괴의 한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현재의 저유가 기조는 탈석유 전환이 늦은 이란, 이라크 등 재정이 취약한 산유국의 불안을 가중시켜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위험을 더욱 높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편, 국제 유가는 OPEC+의 증산 결정에도 혼조세를 보였다. 연초 배럴에 80달러에 육박했던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 가격은 지난 4월 60달러 선 아래로 떨어지는 등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번 증산 결정이 유가 하방 압력을 더욱 키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