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소송전에 수십억 달러 기회비용…'상처뿐인 영광'
매장량 고갈 위기감에 우량 유전 확보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
매장량 고갈 위기감에 우량 유전 확보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

이번 분쟁의 핵심은 남미 가이아나 앞바다에 있는 스타브룩(Stabroek) 광구였다. 최근 10년간 발견된 유전 가운데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 이곳은 110억 배럴이 넘는 원유가 매장된 자산으로, 생산 원가는 배럴당 20달러 수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2019년 '0'이었던 생산량은 2025년 3월 말 기준 하루 66만 8000배럴까지 치솟았으며, 2027년 말에는 130만 배럴에 이를 전망이다. 셰브론은 이번 인수를 통해 2030년대까지 안정된 현금 창출과 배당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스타브룩 광구의 운영사이자 지분 45%를 보유한 엑손모빌이 제동을 걸었다. 헤스 지분에 대한 '우선매수권'을 주장하며 국제 중재를 신청한 것이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이번 분쟁은 사실상 양사가 맺은 공동운영계약(JOA)의 단 한 문장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됐다. 판결 이후 엑손 측은 "판결에 동의하지 않지만 결과를 수용한다"고 밝혀 길었던 분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로써 스타브룩 광구는 앞으로 엑손모빌(운영사, 45%), 셰브론(30%), 중국해양석유(CNOOC, 25%)의 3자 협력 체제로 함께 운영한다.
◇ '스탠더드 오일'에 뿌리 둔 100년 라이벌의 패권 다툼
처음에는 퍼미안 분지에 넓은 땅을 가진 셰브론이 앞서갔으나, 2010년 엑손이 410억 달러(약 57조 1335억 원)에 천연가스 업체 XTO를 인수하며 따라붙었다. 이어 2023년 10월, 600억 달러(약 83조 6100억 원)를 들여 셰일 생산업체 파이오니어 내추럴 리소시스를 인수하며 미국 최대 생산업체로 올라섰다. 셰브론은 불과 12일 만에 헤스 인수를 발표하며 즉각 맞대응했다.
이번 인수로 셰브론의 생산량은 2025년 1분기 하루 340만 배럴에서 2030년 400만 배럴을 넘어설 전망이다. 같은 기간 엑손은 450만 배럴에서 540만 배럴로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어서 두 거인의 '군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 '매장량 고갈' 위기…인수합병은 생존 위한 선택
이런 인수합병 경쟁의 배경에는 석유 기업들이 맞닥뜨린 '매장량 고갈'이라는 근본 위기가 있다. 탐사할 만한 유망 지역은 줄어드는 반면, 주주들은 비용 통제를 압박하고 있다. 특히 셰브론은 지난해 매장량 대체율(RRR)이 –4%까지 떨어져 비상이 걸렸다. LSEG 자료에 따르면 셰브론의 확인 매장량은 98억 배럴로 10년 만에 가장 적으며, 이는 현재 생산 수준으로 8년밖에 채굴할 수 없는 양이다. 10년 전 10년 치였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줄었으며, 12년 치 매장량을 확보한 엑손과도 대조를 이룬다.
과거에는 대규모 탐사를 통해 새로운 유전을 발견했지만, 최근에는 비용 절감 때문에 탐사 활동이 크게 줄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석유 매장량의 3분의 2 이상이 이란, 베네수엘라, 러시아나 OPEC 회원국처럼 서방 기업의 접근이 제한된 나라에 묶여 있다. 이런 형편에서 가이아나 같은 저비용·저위험 지역의 대규모 유전은 서방 기업들에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고, 두 공룡이 수십억 달러의 소송전까지 불사하며 달려든 까닭이다.
우여곡절 끝에 인수를 확정했지만 셰브론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2025년 말까지 10억 달러(약 1조 3935억 원)의 연간 비용 시너지를 내기 위해 인력을 줄이겠다고 예고했으며, 구조조정과 안전 문제, 지정학 위기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다.
이처럼 시장의 장기 평가는 엇갈린다. 중재가 길어지면서 헤스 인수 발표 이후 셰브론 주가는 9%가량 하락하며 관망세를 보였지만, 불확실성이 사라진 판결 직후에는 시장이 바로 반응했다. 셰브론 주가는 3~5% 올랐으며, 인수 대상인 헤스 주가는 7~11%까지 뛰며 안도감을 나타냈다. 셰브론은 수년 치 현금흐름을 놓치고 막대한 법률·통합 비용을 치르는 등 단기 손실을 감수했지만, 앞으로 수십 년의 성장을 담보할 핵심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전략상으로는 더 큰 승리를 거뒀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