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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피터 틸, 실리콘밸리 보수화 이끌며 미국 테크 산업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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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피터 틸, 실리콘밸리 보수화 이끌며 미국 테크 산업 재편

'팔란티어 마피아' 350개사 설립…기독교 신앙 기반 결속
트럼프 자금줄에서 차세대 킹메이커로…JD 밴스 등 후원
트럼프 대통령과 페이팔 공동창업자이자 억만장자 투자자인 피터 틸(오른쪽). 그는 실리콘밸리의 보수화를 이끄는 핵심 인물로 꼽힌다. 틸은 자신의 인맥 네트워크인 '팔란티어 마피아'를 통해 미국 테크 산업과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트럼프 대통령과 페이팔 공동창업자이자 억만장자 투자자인 피터 틸(오른쪽). 그는 실리콘밸리의 보수화를 이끄는 핵심 인물로 꼽힌다. 틸은 자신의 인맥 네트워크인 '팔란티어 마피아'를 통해 미국 테크 산업과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 실리콘밸리에 보수화 물결이 거세다. 과거 진보 성향의 자유주의가 지배하던 첨단 기술의 심장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후원자이자 억만장자 투자자인 피터 틸이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르며 미국 테크 산업의 지형을 흔들고 있다. 그는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를 중심으로 '팔란티어 마피아'라는 강력한 인맥을 구축해 미국 정계와 산업계 전반으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고 닛케이가 3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팔란티어는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방부를 주요 고객으로 삼는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유럽 에어버스의 항공기 개발 시스템과 항공사 고장 예측 서비스로 기술력을 인정받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이민 단속 정책에 협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치 테마주'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이 회사를 창업한 인물이 바로 거물 벤처캐피털리스트 피터 틸이다. 그는 국내에 일론 머스크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전자결제 서비스의 선구자인 페이팔을 공동 창업하고 페이스북(현 메타)과 스페이스X에 초기 투자해 성공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틸은 오바마 행정부 말기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관계를 다졌다. 중국의 부상을 방치하고 인공지능(AI)·암호화폐 규제를 강화한 민주당에 반발해 트럼프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하며 1기 행정부 출범에 크게 기여했다.
◇ '팔란티어 마피아'와 기독교 신앙의 결합

트럼프 지원을 계기로 한때 실리콘밸리 주류에서 밀려났던 틸은 이제 '테크라이트(Tech Right)'로 불리는 보수 성향 기술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의 영향력 핵심에는 '팔란티어 마피아'가 있다. 팔란티어에서 경력을 쌓은 젊은 인재들이 틸의 벤처캐피털 '파운더스 펀드' 등의 지원을 받아 창업한 기업 집단을 일컫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팔란티어 출신이 창업했거나 경영하는 테크 기업은 350곳을 넘는다. 이 가운데 12곳은 기업가치가 10억 달러(약 1조 3932억 원)를 웃도는 유니콘 기업이다.

이들 '마피아'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간사이가쿠인대학의 야나기사와 마미 준교수는 "열성 신자인 틸의 존재와 신앙 부흥 운동, 그에 바탕을 둔 보수 사상의 확산이 여러 면에서 겹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틸은 최근 실리콘밸리의 한 교회에서 '기독교 종말론과 혁신'을 주제로 네 차례 강의를 맡아 젊은 기업가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여기서 종말은 '완성'을 뜻하며, 인류의 완성을 위해 기술 혁신이 필수라는 게 골자다.

◇ 반중국·리버테리언…트럼프 후계자까지 키워내

그의 저서 '제로 투 원'에 담긴 창업 철학도 이런 사상과 맞닿아 있다. 그는 창업을 '무(0)에서 유(1)를 창조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신의 천지창조와 같은 이 행위를 위해 기술 탐구를 멈춰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무신론·진보 성향이 강했던 실리콘밸리에 공화당 지지자가 늘어나는 현상에 그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틸의 또 다른 특징은 확고한 반중국 태도다. 그는 저서에서 중국을 '서구 문명의 모방을 권위주의 체제로 효율화해 세계를 석권하는 존재'라고 비판하며 '수평적 진보'로 깎아내렸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수직적 진보'와 구별한 것이다. 이런 점은 중국을 주요 시장으로 여기는 머스크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정부 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는 '리버테리언'이면서도 CIA 같은 정부 기관과 협력하는 모순에 대해 고베대학의 이노우에 히로키 교수는 "중국 등 권위주의와 싸우기 위해 정부와 협력하는 것은 그의 종교적 사명감 안에서 모순되지 않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틸의 영향력은 이제 실리콘밸리를 넘어 워싱턴 정가로 향한다. 전문가들은 그와 머스크가 2028년 대선 후보로 J.D. 밴스 부통령과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을 지지할 것으로 내다본다. 특히 트럼프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밴스는 투자사 시절 틸의 부하 직원이었다. 앞으로 미국 기술 정책의 방향을 가늠하려면 피터 틸의 행보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