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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韓·日, 미국발 '9000억 달러' 투자 요구에 공식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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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韓·日, 미국발 '9000억 달러' 투자 요구에 공식 제동

한국 "외환보유고 80% 규모 현금 투자 불가"…경제주권 침해 우려 확산
일본 차기 총리 후보 "국익 반하면 재협상"…투자 방식 두고 미국과 이견
사진=오픈AI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요구한 9000억 달러(약 1260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이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혔다. 한국 정부가 '현실적으로 수용이 불가능하다'고 공식화하고, 일본의 차기 유력 총리 후보마저 '국익에 반하면 재협상'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미국의 압박에 동맹국들이 정면으로 제동을 거는 모양새다. 미국이 투자금 증액까지 비공식적으로 요구하며 '선납' 방식의 현금 투자를 압박하는 가운데, 이를 수용하면 경제 주권마저 침해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한일 양국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2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외환보유고 80% 요구에…'수용 불가' 못 박은 한국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8일 채널A 뉴스와 인터뷰하며 정부 방침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3500억 달러(약 49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과 관련해 "현금으로 지불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객관으로 보나 현실로 보나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우리의 태도는 협상 전술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면 재정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정부 내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일 양국의 투자 약속을 '선납(up front)'이라고 규정한 것을 직접 반박하며, 협상의 여지가 없는 원칙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 정부의 우려는 단순한 재정 부담을 넘어 국가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에 바탕을 둔다. 앞서 김민석 국무총리는 블룸버그 통신과 인터뷰에서 미국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하지 않으면 대규모 투자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힘주어 말했다. 3500억 달러(약 490조 원)는 한국 총 외환보유고의 80%를 웃도는 막대한 금액이어서, 안전장치 없이 외화가 급격히 빠져나가면 국가 경제에 심각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측은 단순 현금 투자를 넘어 더 노골적인 요구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한국 측에 투자금 규모를 일본 수준인 5500억 달러(약 770조 원)까지 늘리라고 비공식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미국은 대출 방식보다 지분 투자 형태의 직접 현금 투입을 선호하며, 투자처 선정과 수익 대부분을 미국이 통제하는 구조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일방통행식 압박에 국회 안팎에서도 즉각 철회를 요구하는 반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 간 만남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구상이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국익' 앞세운 일본, 재협상 카드 꺼내드나


일본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 5500억 달러(약 770조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지만, 자금 조달 방식과 성격을 두고 내부에서 신중론이 퍼지고 있다. 특히 집권 자민당의 유력 대표 후보인 다카이치 사나에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29일 "합의 이행 과정에서 일본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불공정한 점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생각을 고수해야 한다"며 "재협상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고 밝혔다.

미일 양국이 체결한 양해각서(MOU)를 보면, 미국이 투자 프로젝트를 지정하면 일본은 45영업일 안에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해 지정 계좌에 넣어야 한다. 그러나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측 수석 무역협상대표는 이와 결이 다른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는 "투자를 주도할 일본국제협력은행(JBIC)과 일본무역보험(NEXI)은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사업에는 자금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실상 자금 지원에 의문을 제기했다. 전체 투자액의 1~2%만이 실제 투자이고 나머지는 대출과 대출 보증으로 채울 것이라는 게 일본 측의 계산이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무역 협상을 넘어 동맹 관계의 시험대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대규모 현금 투자를 강제하면 외환 위기는 물론 경제 주권까지 침해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으며, 이번 협상이 한미 동맹과 경제 협력 전반에 미칠 좋지 않은 영향에 대한 불안감도 퍼지고 있다. 일본 역시 새 총리를 뽑은 뒤 협상 방향에 변화가 있을 수 있어 당분간 미국과 긴장 관계를 이어갈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