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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日 'PS 개발자'의 반격…"엔비디아 9배 효율" 칩, 현실은 '수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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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日 'PS 개발자'의 반격…"엔비디아 9배 효율" 칩, 현실은 '수억'

소니·후지쯔 '드림팀'의 우회로…AI 아닌 '채굴 시장' 우선 공략
'수조원대' 칩 전쟁터에 '수억' 참전…日 국가대표 '라피더스'가 유일한 희망
렌조 창업멤버로 참여한 전 소니 개발자 후지와라 겐마(앞줄 오른쪽)와 후지쓰 출신의 나카지마 야스히코 교수(뒷줄 오른쪽 첫 번째). 사진=렌조이미지 확대보기
렌조 창업멤버로 참여한 전 소니 개발자 후지와라 겐마(앞줄 오른쪽)와 후지쓰 출신의 나카지마 야스히코 교수(뒷줄 오른쪽 첫 번째). 사진=렌조

미국 엔비디아가 AI 반도체 시장의 90%를 장악한 '절대 1강' 체제에, 일본의 '전설적인 엔지니어'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소니 플레이스테이션(PS) 2와 3의 핵심 칩을 설계했던 개발자와 1990년대 세계 최고속 슈퍼컴퓨터를 만들었던 개발자가 의기투합해 AI 반도체 스타트업 '렌조(Renzo)'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사업화에 나섰다고 닛케이가 16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들은 엔비디아 대비 최대 9배 높은 전력 효율을 무기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들의 앞에는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쿠다(CUDA)'라는 철옹성과, AI 칩 개발에 수천억 원이 아닌 '수억 원' 수준의 초기 자금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놓여있다. 렌조의 도전은 일본 반도체 부활의 신호탄일까, 아니면 또 하나의 무모한 시도로 그칠까.

'9배 효율' 내건 'PS 드림팀'


렌조의 창업자 라인업은 화려하다. 창업자인 후지와라 켄마 대표는 소니(SCE)에서 PS2와 PS3의 핵심 연산 장치인 CPU와 GPU 개발을 주도한 인물이다. 공동 창업자인 나카지마 야스히코 나라첨단과학기술대학원 교수는 후지쯔에서 1990년대 세계 최고 속도를 기록한 슈퍼컴퓨터 'VPP500'의 CPU 개발에 참여했다. 일본 반도체 업계의 '드림팀'이 결성된 셈이다.
렌조가 내세운 비장의 무기는 '전력 효율'이다. 이들은 메모리와의 데이터 통신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독자 기술을 통해, 실증 단계에서 엔비디아 GPU 대비 3배에서 최대 9배 높은 전력 효율을 확인했다고 주장한다. AI 연산의 가장 큰 병목 현상인 '데이터 이동'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하지만 업계의 시각은 신중하다. '9배 효율'이라는 주장은 실제 양산 칩을 통한 벤치마크가 아닌, 내부 시뮬레이션 단계의 수치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메모리 병목 현상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렌조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미 미국의 세레브라스(Cerebras), 그록(Groq) 등 수많은 스타트업이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다. 렌조의 기술이 과연 어느 정도의 차별성을 가졌는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쿠다 철옹성' 앞에 무너진 거인들


렌조가 마주한 첫 번째 장벽은 하드웨어 성능이 아닌,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생태계 '쿠다(CUDA)'다. 전 세계 AI 개발자의 90% 이상이 쿠다를 기반으로 연구와 개발을 진행한다. 아무리 뛰어난 칩을 만들어도, 개발자들이 쿠다를 버리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학습하게 만들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지난 10년간 수많은 '엔비디아 대항마'들의 실패가 증명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그래프코어(Graphcore)다. 그래프코어는 마이크로소프트, BMW 등으로부터 7억 6700만 달러(약 1조 1100억 원)라는 막대한 투자를 유치하며 '유럽의 희망'으로 불렸다. 하지만 독자 소프트웨어 스택인 '포플러(Poplar)'는 쿠다의 벽을 넘지 못했고, 2022년에만 2억 달러(약 2900억 원)가 넘는 손실을 기록하다 결국 헐값에 매각됐다. 업계는 그래프코어의 제품이 아닌, '팀과 전문성'만 인수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세레브라스 역시 '웨이퍼 스케일 칩'이라는 혁신적 하드웨어로 메모리 병목 현상을 공략했지만, 쿠다를 지원하지 않아 고성능이 필요한 일부 특수 시장에 머물러 있다. 이들이 업계 표준 벤치마크인 'MLPerf' 결과 제출을 꺼리는 것 또한 '쿠다 생태계' 없이는 범용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방증한다.

렌조 역시 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후지와라 대표 스스로가 "소프트웨어 생태계 없이 엔비디아에 도전해선 승산이 없다"고 인정했다. 이들이 첫 번째 목표 시장으로 AI 데이터센터가 아닌 암호화폐 '채굴(마이닝)' 시장을 택한 것도, 쿠다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AI 시장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자 '우회 전략'이다.

'수억' 대 '수조', 자본의 격차


렌조가 마주한 두 번째 장벽은 '자본'이다. 렌조는 마넥스 그룹 등으로부터 '수천만 엔'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다. 이는 한화로 '수억 원' 수준이다.

이는 AI 반도체 개발이라는 '쩐의 전쟁' 무대에 오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2025년 상반기에만 미국 AI 칩 스타트업들은 51억 달러(약 7조 42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실패한 그래프코어가 받은 '구제 금융'만 해도 2억 8000만 달러(약 4000억 원)에 달한다.

첨단 AI 칩은 설계(R&D)와 시제품 제작(Tape-out)에만 수천억 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렌조가 확보한 '수억 원'은 업계에서 '반올림'조차 힘든 '시드 머니'에 불과하다. 이는 본격적인 칩 개발이 아닌, 시뮬레이션이나 지식재산권(IP) 확보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는 규모다. 렌조가 채굴 시장을 통해 "자본을 두텁게 한 뒤" AI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전략은, 그 '두터운 자본'을 마련하기까지 버틸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유일한 희망 '라피더스'


기술과 자본,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렌조에게도 한 가지 기회 요인은 존재한다. 바로 '라피더스(Rapidus)'를 중심으로 한 일본 정부의 국가적 반도체 부활 전략이다.

라피더스는 5조 엔(약 47조 원) 이상이 투입되는 일본의 '국가대표 파운드리' 프로젝트다. 40나노 공정에 머물러 있던 일본이 8세대를 건너뛰고 2027년 2나노 최첨단 공정을 양산하겠다는, 그야말로 '공학적 기적'에 가까운 목표를 내걸었다.

이런 라피더스의 가장 큰 고민은 '고객 확보'다. 이제 막 공장을 짓기 시작한 '검증되지 않은 파운드리'에 수천억 원의 개발비를 맡길 팹리스 고객을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라피더스는 IBM, imec 등과 협력하며 필사적으로 '설계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렌조의 존재 이유가 부각된다. 렌조의 "최첨단 칩을 설계해 라피더스에 발주하고 싶다"는 포부는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다. 라피더스에게는 렌조와 같은 '국산 팹리스 고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결국 렌조의 생존은 '9배 효율'이라는 기술적 주장이나 '채굴 시장'이라는 임시 전략보다, '일본 반도체 부활'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어젠다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편승하느냐에 달려있을 가능성이 높다. 렌조의 도전은 엔비디아와의 기술 경쟁이라기보다, '라피더스 생태계'의 성공 여부와 운명을 같이하는 '전략적 베팅'에 가깝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