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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단순 하청기지 아니다"…인도, 소재·부품·AI '기술 독립'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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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단순 하청기지 아니다"…인도, 소재·부품·AI '기술 독립' 선언

정부 8억 달러 쏟아붓고 후지필름 유치…'제조 주권' 확보 총력전
타타는 인재 키우고 스타트업은 '탈(脫) GPU'…생태계 체질 바뀐다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인도의 반도체 및 전자 산업이 단순 조립 기지라는 꼬리표를 떼고 독자적인 생태계를 갖춘 '기술 허브'로의 진화를 서두르고 있다. 인도 정부가 대규모 부품 제조 프로젝트를 승인하며 판을 깔자, 글로벌 기업인 후지필름이 수출 거점 구축으로 화답했고, 타타그룹은 실무 인재 양성에 착수했다. 여기에 현지 스타트업과 제조사가 독자적인 AI(인공지능) 기술과 완제품 스마트폰을 잇달아 내놓으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균형 성장을 꾀하는 모양새다. 이는 정책 자금 투입, 해외 자본 유치, 인적 자원 개발, 토종 기술 확보라는 4박자가 맞물려 돌아가는 형국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인도의 전략적 입지가 급격히 격상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8억 달러 '실탄' 장전…부품 국산화 속도


인도 전자 산업 고도화의 신호탄은 정부의 과감한 재정 지원에서 시작됐다. 인도 전자정보기술부(MeitY)는 전자부품 제조 계획(ECMS)의 2차 지원 대상 17개 프로젝트를 전격 승인했다. 이번에 승인된 투자 규모만 717억2000만 루피(약 1조1860억 원)에 달한다.

이번 조치는 지난 1차 승인에서 553억2000만 루피(약 9155억 원) 규모의 7개 프로젝트를 통과시킨 데 이은 연속적인 정책 집행이다. 인도 정부는 이번 투자가 단순히 공장을 짓는 데 그치지 않고, 약 6511억1000만 루피(약 10조7758억 원) 규모의 생산 유발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특히 1만1808개의 직접 일자리 창출이 예고되어 있어, 제조업의 뿌리인 부품 산업의 저변을 확대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이는 완제품 조립에 편중됐던 산업 구조를 핵심 부품 제조로 확장해 공급망의 내재화 비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적 포석으로 분석된다.

후지필름 "印, 내수 넘어 수출 허브로"


정부의 지원 사격은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후지필름은 인도를 반도체 소재의 전략적 생산 거점으로 낙점했다. 고토 테이이치 후지필름 사장은 지난 14일 도쿄에서 열린 발표를 통해 인도 내 반도체 재료 제조 시설 설립 계획을 공식화했다.

주목할 점은 이번 투자의 목적이다. 후지필름은 신설 공장의 역할을 인도 내수 시장 공급에 한정하지 않고, 인근 국가로 제품을 내보내는 '지역 수출 허브'로 정의했다. 이는 인도가 단순히 소비 시장으로서의 매력뿐만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소재 공급망의 핵심 결절점(Node)으로서의 경쟁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미·중 갈등으로 인한 공급망 분절화 속에서 인도가 신뢰할 수 있는 대안 생산 기지로 부상하고 있음이 재확인된 셈이다.

타타, 공장 돌릴 '반도체 전사' 육성


설비 투자가 늘어남에 따라 이를 운용할 전문 인력 확보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인도 최대 기업 타타그룹 산하 타타 일렉트로닉스는 하드웨어 인프라 구축을 넘어 소프트파워인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타타 일렉트로닉스는 인도 국립전자정보기술원(NIELIT) 코히마 센터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반도체 실무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다.

협력의 핵심은 조립, 테스트, 마킹, 패키징(ATMP) 등 반도체 후공정 분야의 기술 인력을 길러내는 것이다. 특히 인도 북동부 지역을 타깃으로 한 이번 협약은 반도체 산업의 낙수 효과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동시에, 급증하는 제조 현장의 인력 수요를 선제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공장만 짓고 기술은 해외 인력에 의존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자국 내에서 안정적인 인재 공급망(Talent Pipeline)을 구축하려는 장기적 안목이 엿보인다.

"GPU 대신 CPU"…'인도형 AI'의 역습


하드웨어와 인력 양성이 진행되는 동안,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인도의 열악한 전력 사정과 비용 효율성을 고려한 독자적인 기술 해법이 제시됐다. 인도 스타트업 '지로랩스(Ziroh Labs)'는 고비용·고전력의 GPU(그래픽처리장치) 대신 CPU(중앙처리장치)를 기반으로 하는 AI 런타임 기술 '콤팩트 AI(Kompact AI)'를 선보였다.

지로랩스는 신흥 시장에서의 기업용 AI 도입 성패가 모델의 품질뿐만 아니라 '에너지 가용성'과 '하드웨어 주권'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전력 인프라가 불안정하거나 비용에 민감한 신흥국 시장에서는 GPU 의존도를 낮춘 CPU 기반 AI 컴퓨팅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는 실리콘밸리의 기술 트렌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현지 인프라 환경에 최적화된 기술 표준을 제시함으로써 기술적 종속을 탈피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메이드 인 인디아' 폰, 완제품 경쟁력 입증


부품, 소재, 인력, 소프트웨어 기술의 축적은 결국 완제품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벵갈루루 기반의 전자 브랜드 '워블(Wobble)'은 자사 최초의 스마트폰 '워블 원(Wobble One)'을 출시하며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었다.

기존 스마트 TV 등 가전제품 라인업을 보유했던 워블은 이번 신제품을 통해 모바일 기기로 영역을 확장했다. '메이드 인 인디아'를 전면에 내세운 이 제품은 성능과 배터리, 카메라 등 기본기에 충실한 전략으로 현지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이는 인도의 전자 산업이 부품 생산부터 최종 소비재 판매까지 아우르는 전주기적(Full-cycle) 역량을 갖춰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정책적 지원과 글로벌 협력, 그리고 자생적인 기술 혁신이 맞물리며 인도의 IT·반도체 굴기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