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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파이프라인이 바꾸는 유라시아 힘의 지도와 한국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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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파이프라인이 바꾸는 유라시아 힘의 지도와 한국의 전략

중앙아시아의 ‘환승 주권’의 부상, 미중 패권 경쟁의 에너지 전선, 그리고 한국의 에너지·안보 대전략
중국은 채굴 거래, 기술 이전, 인프라 프로젝트를 통해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지배력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중국은 채굴 거래, 기술 이전, 인프라 프로젝트를 통해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지배력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파이프라인은 물류가 아니라 권력이다


'중앙아시아의 파이프라인 외교'란 풍부한 석유 및 천연가스 자원을 통제하고 운송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역내 국가들과 주변 강대국들(러시아, 중국, 미국, 유럽연합, 이란 등) 간에 벌어지는 지정학적 경쟁과 외교적 노력을 말한다. 세 개의 평행한 라인으로 구성된 중앙아시아-중국 가스 파이프라인(CACGP), 중앙아시아-센터 가스 파이프라인 시스템(CAC), 카자흐스탄-중국 송유관 등 몇 개의 파이프라인이 운영되고 있고 새로 지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 여러 파이프라인을 단순한 수출 경로 다변화로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건설되거나 추진 중인 파이프라인들은 운송 인프라를 넘어서 국가의 생존 공간을 규정하는 권력 장치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내륙국이라는 조건은 지리적 사실이 아니라 전략적 취약성으로 작동해 왔다.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힌 국가는 생산 능력보다 환승 통로의 통제권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에서 “경로”는 곧 “정치”였다.

구(舊) 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가 얻은 것은 형식적 주권이었고, 잃지 못한 것은 인프라 의존성이다. 북향 환승망에 묶인 채, 글로벌 시장 접근은 특정 강대국의 중개를 거쳐야 했고, 그 중개는 언제든 지렛대가 될 수 있었다. 환승은 중립적 기능이 아니라 압박의 기술이었다. 결국 이 지역의 외교는 동맹 선택 이전에 경로 선택, 정확히는 경로 다변화의 수준과 속도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이 같은 구조는 질적으로 변했다. 러시아가 “안정적 환승 허브”라는 지위를 상실하면서 중앙아시아의 기존 균형은 급격히 불안정해졌다. 유럽은 가격이 아니라 안보를 이유로 러시아 의존을 줄이기 시작했고, 중앙아시아 생산국은 경제적 위험이 아닌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러시아 경로 편중을 재검토하게 됐다. 이 때 남캅카스(영어명은 트랜스코카서스)와 카스피해는 주변부에서 경첩(hinge), 즉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 지역으로 바뀐다. 유라시아의 힘은 철학이 아니라 통로에서 재배치되는 것이다.

미중 패권 경쟁은 ‘기술’이 아니라 ‘흐름’을 둘러싼 전쟁으로 진화한다


미중 패권 경쟁을 반도체, 인공지능(AI), 수출 통제 중심의 기술 전쟁으로만 이해하면 절반만 본 것이다. 기술 경쟁은 흐름 경쟁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에너지, 원자재, 물류, 금융 결제, 보험과 제재라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가 기술 경쟁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

미국은 동맹과 규범, 제재 체계를 통해 허용되는 흐름을 선별하려 하고, 중국은 수요와 자본, 건설 능력을 통해 대체 가능한 흐름을 만든다. 러시아는 환승과 차단을 통해 흐름 자체를 무기화해 왔다. 중앙아시아는 이 세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동맹에 편입되지 않고도 선택지를 늘리는 방법을 찾는다.

이 점에서 파이프라인 외교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중소국이 패권 경쟁을 관리하는 구조적 기술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추구하는 것은 어느 진영에 속하는가가 아니라, 어느 진영도 자신을 배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이프라인은 강대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중소국이 외교적 생존 공간을 확보하는 방패다.

러시아의 환승 레버리지 약화는 새로운 불안정을 낳는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에너지 생산국이자 환승국으로서 유럽과 주변국을 동시에 압박해 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 지위는 급격히 약화됐다. 유럽이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을 줄이고, 중앙아시아가 러시아 경로 편중을 완화할수록 러시아의 전통적 레버리지는 줄어든다.

문제는 레버리지가 줄어드는 강대국이 대개 더 예측 불가능한 수단을 찾는다는 점이다. 군사적 긴장 고조, 정보전, 지역 분쟁 개입, 중러 전략 결속 강화는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중앙아시아의 환승 질서 변화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의 전략적 행동 반경을 동북아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한국이 유라시아의 에너지 지도를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 전장의 변화는 결국 동북아의 안보 비용과 연결된다.

유럽의 탈러시아는 도덕이 아니라 안보다


유럽의 에너지 전환은 가격 논리가 아니라 안보 논리로 움직인다. 러시아산 에너지 배제는 경제적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이며, 에너지·제재·금융·규범을 하나의 체계로 묶는 새로운 질서 구축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자원은 단순한 대체 물량이 아니라, 유럽이 재설계하는 안보 질서의 일부로 편입된다. 남캅카스 회랑, 카스피해 횡단 물류, 트랜스카스피 논의는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협상력을 만든다. 가능한 경로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전략이 된다.

중국은 규모로 흡수하고, 중앙아시아는 경로로 견제한다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은 가장 현실적인 파트너다. 수요, 금융, 건설 능력 어느 것도 대체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중앙아시아는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또 다른 구조적 취약성으로 본다.

따라서 파이프라인 외교는 러시아 탈피이자 동시에 중국 편중 방지 전략이다. 다변화는 선택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흡수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의미한다. 중앙아시아의 전략은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가 아니라, 줄을 여러 개 걸어두는 것이다.

남캅카스는 유라시아의 경첩이 되었고, 터키는 관문 국가로 부상한다


남캅카스 회랑의 부상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터키를 단순 통과국에서 질서 설계의 일부로 끌어올린다. 터키는 에너지·물류의 관문 국가로서 전략적 가치를 높이고, 아제르바이잔은 생산국을 넘어 회랑 국가로 변모한다.

경첩 지역은 항상 중요하지만 동시에 불안정하다. 회랑이 중요한 만큼 교란의 유인도 커진다. 이 불안정성은 유라시아 전체의 위험 프리미엄을 바꾸고, 결국 아시아 시장 가격과 해상로 리스크로 전이된다.

한국에 주는 첫 번째 함의: 에너지 안보를 ‘수입선’이 아니라 ‘리스크 포트폴리오’로 재설계하라

한국은 에너지 조달을 가격과 물량 중심으로 관리해 왔다. 그러나 에너지 흐름이 안보화된 세계에서는 이 접근이 충분하지 않다. 특정 지역, 특정 경로, 특정 통화, 특정 보험 시장에 대한 집중은 전략적 취약성이 된다.

중앙아시아 파이프라인 질서 변화는 한국에게 직접적인 공급 변화보다 가격 구조·위험 분산·조달 안정성이라는 간접 경로로 영향을 준다. 한국은 에너지 조달을 국가 리스크 관리의 문제로 격상시켜야 한다.

한국에 주는 두 번째 함의: 금융·보험·제재가 에너지 흐름의 숨은 밸브다


오늘날 파이프라인을 움직이는 것은 강철이 아니라 금융과 보험, 제재 준수 체계다. 물리적 경로가 있어도 결제와 보험이 막히면 흐름은 멈춘다. 한국의 에너지 전략은 조달 계약을 넘어 금융·보험·제재 리스크 관리 능력을 포함해야 한다.

이는 에너지 정책과 금융 정책, 외교 정책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에 주는 세 번째 함의: 카스피–남캅카스–인도태평양을 하나의 전략 연쇄로 보라


유라시아 내륙 회랑의 안정성은 해상로 리스크와 직결된다. 회랑이 다원화될수록 해상로 부담은 분산되고, 회랑이 막힐수록 해상로의 전략적 압박은 커진다. 해상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에게 이는 곧 안보 비용 문제다.

중앙아시아는 멀리 있지만, 그 파장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거쳐 한국 산업 경쟁력과 방위비로 돌아온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파이프라인은 중앙아시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전략 문법을 바꾼다


중앙아시아의 파이프라인 외교는 지역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미중 패권 경쟁이 기술에서 흐름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조적 신호다. 러시아의 영향력 약화, 유럽의 에너지 안보화, 중국의 흡수 전략은 모두 유라시아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한국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에너지·물류·금융·외교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어 리스크를 관리하는 국가로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변화의 결과를 가격과 위기 비용으로 뒤늦게 감당할 것인가다. 파이프라인은 멀리 있지만, 그 정치적 진동은 이미 한국의 문 앞에 와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