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딥시크, '클로드' 1600만 번 훔쳐 배웠나…미중 AI 도둑질 전쟁, 삼성·SK 반도체 수출통제 불씨 될 수도

글로벌이코노믹

딥시크, '클로드' 1600만 번 훔쳐 배웠나…미중 AI 도둑질 전쟁, 삼성·SK 반도체 수출통제 불씨 될 수도

앤스로픽, 중국 AI 3사의 가짜 계정 2만4000개 '산업 규모 증류 공격' 공식 폭로
화웨이, 제재 7년 만에 매출 128조 원 돌파…자체 AI 칩 '어센드'로 미국 포위망 뚫어
AI 기술 탈취 → 반도체 수출통제 강화 연결고리…HBM 대중 수출 추가 제한 가능성 커져
미국 AI 기업 앤스로픽이 중국 AI 3사를 향해 수년간 쌓은 우리의 연구를 수개월 만에 훔쳐갔다고 공개 폭로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AI 기업 앤스로픽이 중국 AI 3사를 향해 "수년간 쌓은 우리의 연구를 수개월 만에 훔쳐갔다"고 공개 폭로했다. 이미지=제미나이3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매출 담당자들은 지금 어떤 뉴스를 가장 두려워할까. 아마도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명단에 새 항목이 추가된다는 소식일 것이다. 그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사건이 지난 23일(현지 시각)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터졌다.

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앤스로픽이 중국 AI 3사를 향해 "수년간 쌓은 우리의 연구를 수개월 만에 훔쳐갔다"고 공개 폭로했다. 같은 날 중국 화웨이는 미국의 고강도 제재를 뚫고 2025년 연매출 약 184조 원(8800억 위안)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두 사건은 겉보기엔 별개지만,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가르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고 있다.

가짜 계정 2만4000개, 1600만 번의 질문…'AI 기술 절도'의 실체


앤스로픽은 지난 23일 공식 블로그를 통해 딥시크(DeepSeek)·문샷AI(Moonshot AI)·미니맥스(MiniMax) 등 중국 AI 기업 3사가 자사 AI 모델 '클로드(Claude)'의 핵심 기능을 조직적으로 빼돌렸다고 밝혔다. 블룸버그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같은 날 이를 연이어 보도했다.

앤스로픽이 밝힌 피해 규모는 구체적이며 기업별로 뚜렷하게 갈린다. 미니맥스가 약 1300만 건으로 가장 많았다. 새 모델을 출시한 지 24시간 만에 클로드로 향하던 트래픽의 절반을 자사 쪽으로 돌렸을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문샷AI는 약 340만 건을 생성하며 에이전트 추론과 코딩, 컴퓨터 비전 등 기술집약적 영역을 집중 공략했다. 딥시크는 약 15만 건으로 건수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내용은 달랐다. 강화학습용 보상 모델 데이터를 확보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에 대한 검열 우회 답변을 대량으로 수집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3사를 합산하면 가짜 계정 약 2만4000개를 통해 클로드와 나눈 대화가 총 1600만 건을 넘어선다.

이들이 쓴 방법이 'AI 지식 증류(knowledge distillation)'다. 쉽게 말하면, 실력 좋은 선생님(클로드)이 낸 답안지를 수천만 번 베껴 자기 것으로 만드는 행위다. AI 업계에서 자사 대형 모델을 경량화할 때 합법적으로 쓰는 기술이지만, 남의 모델을 무단으로 대상으로 삼으면 기술 도용이 된다.

이들은 '히드라 클러스터(Hydra Cluster)' 구조의 우회 접속 서비스를 써서 탐지를 피했다. 계정이 차단되면 즉시 대체 계정을 투입하는 방식이었다. 앤스로픽은 국가 안보상 이유로 중국 내 클로드 접속 자체를 막아뒀는데 이마저 뚫렸다.

앤스로픽도 이 시비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해 6월 소셜미디어 플랫폼 레딧(Reddit)은 앤스로픽이 자사 게시물 10만 건 이상을 허락 없이 긁어 클로드 학습에 썼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 읽는 것은 합법이지만, 수만 권을 허락 없이 통째로 복사해 자기 책을 만드는 데 쓰면 저작권법에 걸린다. AI 기업들이 모델을 학습시킬 때 인터넷의 텍스트를 대규모로 '긁어내는' 것이 무단 데이터 스크래핑이며, 이는 도덕적 비난과 함께 법적 시비로 계속되고 있다.

앤스로픽의 이번 폭로가 위선이라는 비판이 실리콘밸리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AI 인프라 기업 IO.Net 공동 창업자 토리 그린은 SNS에 "앤스로픽도 공개 인터넷으로 학습해 놓고, 남이 자신들한테서 배우면 '증류 공격'이라 부른다"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앤스로픽의 폭로가 가진 정치적 파급력은 크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스로픽 최고경영자(CEO)는 앞서 트럼프 행정부의 엔비디아 AI 칩 대중국 수출 완화 방침을 "북한에 핵무기를 파는 것과 비슷한 실수"라고 비판했다. 악시오스는 이날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이 아모데이 CEO를 국방부로 소환해 클로드의 군사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미 하원 국토안보위원회는 아모데이 CEO에게 이번 공격의 함의와 대응책을 청문할 방침이라고 알려졌다.

오픈AI도 이달 초 미 하원 중국특별위원회에 "딥시크 등 중국 기업이 자사 모델을 대규모로 복제하고 있다"는 메모를 제출했다. 구글 역시 같은 날 자사 AI 모델 '제미나이(Gemini)'를 겨냥한 증류 공격 사례를 공개했다. 10만 건 이상의 질의로 추론 능력을 복제하려 한 캠페인이 탐지됐고, 국가 연계 세력의 개입 흔적도 확인됐다고 구글은 밝혔다. 미국 주요 AI 기업 3사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압박하고 있다.

제재 7년, 화웨이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같은 날 광둥성 고품질 발전 회의장에서는 화웨이 이사회 의장 량화(梁华)가 담담하게 숫자를 읊었다. 2025년 연 매출 8800억 위안. 2024년 8621억 위안(약 180조 원) 대비 2.1% 늘어난, 역대 두 번째 최고치다. 2018년 미국의 제재가 시작된 뒤 7년 만의 성적표다.

수치만 보면 평온하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프다. 상반기 순이익은 372억 위안(약 7조80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2% 줄었다. 연구개발비는 상반기에만 969억5000만 위안(약 20조3200억 원)을 집행했다. 매출의 22.7%다. 삼성전자의 연간 연구개발비 비율(약 9~10%)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을 제재 속에서도 유지하고 있다.

매출 증가율은 2024년 22.4%에서 2025년 2.1%로 급감했다. 이를 '성장 정체'로 읽으면 오판이다. 2022년 미국이 첨단 칩 수출 통제를 강화하면서 화웨이 매출 증가율은 사실상 0%까지 추락했다. 이후 국산 반도체 자립과 생태계 재건에 집중한 끝에 2024년 22% 반등에 성공했고, 2025년 수치는 그 반등의 높은 기저(基底)를 감안하면 오히려 안정적 정착에 가깝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화웨이의 미래 베팅은 두 곳이다. 첫째는 자체 AI 반도체 '어센드(Ascend)' 프로세서다. 량화 의장은 43개 주요 거대언어모델(LLM)이 어센드 기반으로 사전 학습됐고, 200개 이상의 오픈소스 모델이 이식됐으며, 산업 현장에 6000개가 넘는 AI 솔루션이 배치됐다고 밝혔다. 둘째는 자체 운영체제 하모니OS(HarmonyOS)다. 버전 5·6 탑재 기기가 4000만 대를 넘어섰고, 금융·전력·에너지·교통·통신 등 전 산업으로 확산 중이다.

한국 반도체, 샌드위치 압박 심화되나


두 사건을 연결하면 한국 반도체 기업에 불편한 시나리오 하나가 그려진다. '미국 AI 기업들의 집단 고발 → 미 의회·행정부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추가 강화 → 삼성·SK하이닉스 대중 매출 추가 타격'이다.

앤스로픽은 이를 명시적으로 연결했다. "대규모 증류 공격은 고성능 반도체 없이 불가능하다. 칩 접근을 제한하면 불법 증류 규모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AI 저작권 분쟁이 반도체 수출 통제의 근거로 재포장되는 구조다.

화웨이가 어센드 칩 자립 생태계를 빠르게 확장하면서 미국 측의 불안감은 더 커진다. 제재로 첨단 칩을 막아도 중국이 AI 기술 증류로 성능 격차를 좁히는 데다 자체 칩으로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첨단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이 이미 미국 규정에 묶여 있다. 추가 규제가 현실화되면 직격탄은 피하기 어렵다. 두 회사는 중국에서 각각 전체 매출의 상당 비중을 올리고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미국과 중국 모두를 고객으로 두는 구조적 딜레마가 AI 전쟁 국면에서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딥시크·문샷AI·미니맥스 3사는 앤스로픽의 의혹 제기에 아직 공식 반박하지 않았다. 미국 AI 기업들의 고발이 의회 청문회로 이어지고, 행정부가 추가 규제를 검토하는 수순이 현실화될 경우 그 파장은 AI 업계를 넘어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흔들 수 있다.

미·중 AI 패권 전쟁의 최전선은 실리콘밸리와 베이징이지만 그 청구서가 날아올 주소는 서울일 수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