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위기 학습한 중앙은행이 시스템 수호…사모펀드·AI 거품 등 잠재 뇌관은 여전
이미지 확대보기미국·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군사 작전이 수주째 이어지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이 1970년대 오일쇼크를 뛰어넘는 사상 최대의 공급 충격에 빠졌다. 국제 원유 가격은 한 달도 채 안 돼 50%가 치솟았고, 비료 공급망 차질로 식량 위기 경보까지 울리고 있다. 그런데도 글로벌 금융 시스템은 놀라울 만큼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가격 폭등 ≠ 시스템 붕괴…'질서 있는 작동'이 핵심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의 대이란 폭격 개시 이후 국제 유가는 50%, 비료 가격은 30% 넘게 급등했다.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에너지 공급망이 직격탄을 맞았고, 세계 비료 공급량의 20%를 담당하는 걸프 산유국들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글로벌 농업 생산에도 비상이 걸린 상태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WP)가 지난 20일(현지시간) 분석 보도에서 지적했듯, 자산 가격의 급락과 금융 시스템의 붕괴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가격'이 아닌 '질서(Orderly)'다. 투자자가 원하는 시점에 자산을 처분할 수 있고, 예금주가 은행 창구에서 정상적으로 현금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시스템은 아직 살아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2025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의 이른바 '해방의 날' 관세 발표로 뉴욕 증시가 10% 넘게 급락했을 때도 결제·청산 시스템은 한 차례도 멈추지 않았다. WP는 이를 '폭풍 전 마트의 풍경'에 빗댔다. 허리케인 상륙을 앞두고 소비자들이 생수와 비상식량을 사러 몰려들어도, 진열대에 물건이 있고 계산대가 정상 가동된다면 그 매장은 패닉 상태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2008년의 교훈…중앙은행의 '학습된 방어막'
금융 시스템이 이토록 강한 회복력을 유지하는 배경으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뼈아픈 교훈이 첫손에 꼽힌다.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부동산 담보대출) 부실로 은행 간 단기 신용 시장이 마르자 결제 시스템 자체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위기 조기 감지 체계를 전면 재정비하고 신속한 유동성 공급 역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경제가 순식간에 봉쇄 상태에 들어갔을 때도 연준 등 중앙은행들은 전례 없는 속도로 달러 유동성을 시장에 투입해 자금 경색을 조기에 차단했다. 이번 에너지 위기에서도 같은 메커니즘이 재차 가동 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채권 시장 전문가들도 "금리·환율 변동성이 크게 확대됐지만, 주요국 중앙은행이 레포 금리 조작과 달러 스왑라인 가동으로 단기 자금 시장의 숨통을 선제적으로 열어주고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은행 역시 대외 불확실성 확대에 대응해 외환·금융 시장 모니터링 수위를 높인 상태로, 국내 금융기관의 외화 유동성 상황을 일일 점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모펀드·AI 거품까지…복합 뇌관의 경고음
에너지 충격 외에도 시장 참여자들이 주시하는 잠재 뇌관이 둘 더 있다. 2조 달러(약 3000조 원) 규모로 팽창한 미국 사모 신용(Private Credit) 시장의 거품 붕괴 우려와 생성형 인공지능(AI) 산업의 급격한 구조 재편에 따른 혼란이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사모 신용 시장 내 부실 자산 비율이 상승 추세에 있다는 점을 위험 신호로 지목했다.
다행인 점은 이들 악재가 아직까지는 연쇄 폭발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월가 리스크 매니저들 사이에서는 "현재는 가격 충격이지, 시스템 충격이 아니다"라는 진단이 우세하다.
"영원한 고원은 없다"…낙관론 함정을 경계하라
역사는 대폭락 직전에 늘 낙관론이 절정에 달했음을 되풀이해 증언한다. 1929년 대공황 직전 어빙 피셔 경제학자는 주가가 "영원히 높은 고원에 도달했다"고 단언했다가 명성을 잃었다. 1999년 저서 '다우 36,000'을 통해 증시 대세 상승을 자신했던 케빈 해셋 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실제 다우지수가 그 수치에 닿기까지 22년을 기다려야 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시스템 붕괴 이후 회복에는 수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균열이 봉합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어지기 전 포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란 전쟁이 언제 끝날지, 호르무즈 해협이 언제 다시 열릴지 지금으로선 아무도 알 수 없다. 지금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보여주는 침착함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중앙은행들의 쉼 없는 감시와 선제적 개입이 쌓아 올린 구조물이다. 안정이 당연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가 바로 경계심을 가장 바짝 세워야 할 순간이라는 사실을 역사는 반복해서 가르쳐 왔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때일 수도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