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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호르무즈 해협 우회하지 못한 이유는?...'경제안보 불감증'이 부른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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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호르무즈 해협 우회하지 못한 이유는?...'경제안보 불감증'이 부른 재앙

경제적 실효성 따지다 골든타임 놓쳤다... 서류상 계획에 그친 비상 우회로의 민낯
미국만 믿었던 중동국들의 오판... 이란의 '물길 무기화'에 전 세계 금융시장 '패닉'
"송유관 깔아도 소용없다"... 인프라 한계 드러낸 홍해 사태, 새로운 안보 체계 시급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석유 수송로는 1980년대 '유조선 전쟁' 이후 중동 지역에서 꾸준히 논의되어 온 주제다.이미지=구글 AI 제미나이 생성이미지 확대보기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석유 수송로는 1980년대 '유조선 전쟁' 이후 중동 지역에서 꾸준히 논의되어 온 주제다.이미지=구글 AI 제미나이 생성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석유 시장을 유령처럼 떠돈 질문이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폐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 질문은 에너지 전문가들에게는 공포의 시나리오였고, 역내 국가들에는 해묵은 숙제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그 숙제를 미뤄온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세계가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좁은 목구멍을 우회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효성이라는 이름의 방관


이란 전문 뉴스 채널 이란 인터내셔널이 9일(현지 시각) '세계가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분석 기사를 실었다.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유조선 전쟁'을 겪으며 중동 국가들은 해협 폐쇄 가능성에 대비한 비상계획을 끊임없이 검토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내각의 승인 도장만 찍힌 채 서류철 속에서 잠들었다. 그나마 실행된 계획들도 자금 부족에 시달리거나 수송 용량이 해협의 전체 물동량보다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분석가들을 지배했던 논리는 '경제적 실효성'이었다. 실제 혼란이 발생하지 않는 한, 수조 원이 투입되는 예방적 인프라는 낭비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역내 국가들은 당장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거대 프로젝트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것을 꺼렸다.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수로를 즉각 재개방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그들의 안보 불감증을 부채질했다.

지리와 정치에 가로막힌 대체 경로


대체 경로들이 가졌던 물리적·정치적 제약도 발목을 잡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홍해로 이어지는 동서 파이프라인을 가동하고 있지만,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그 거대한 물량을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랍에미리트(UAE)의 푸자이라 터미널 역시 해협을 우회하긴 했으나 지리적으로 호르무즈와 너무 가까워 분쟁 발생 시 완벽한 안전지대가 되기 어려웠다.

정치적 갈등은 더 큰 장애물이었다. 이라크-터키 송유관은 바그다드와 쿠르드 자치 지역 간의 석유 채굴권 분쟁이라는 늪에 빠졌다. 사담 후세인이 야심 차게 건설했던 사우디 관통 송유관(IPSA)은 1990년 이후 가동이 중단되어 고철더미가 됐고, 요르단 아카바 항으로 향하는 계획은 국가 간 뿌리 깊은 불신으로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역내 국가 간 정보 공유 기피와 경쟁 심리는 공동의 안전망 구축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이란의 '독자 노선'과 노출된 취약성


이런 지체 속에서 단 두 나라만이 위협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에너지 다변화에 사활을 건 중국 그리고 스스로 해협을 통제하려 했던 이란이다. 특히 이란은 '고레-자스크' 파이프라인을 완성하며 해협을 완전히 우회하는 수출로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타국의 우회로를 무력화할 수 있는 공격 역량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왔다.

2019년 푸자이라 유조선 공격과 사우디 송유관 드론 테러 그리고 최근 후티 반군의 홍해 선박 공격은 기존의 대체 경로들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란은 물리적 해협뿐만 아니라 그 대안으로 여겨졌던 지점들까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새로운 안보 패러다임의 필요성


최근 발생한 갈등으로 세계 금융시장에서는 수조 달러가 증발했고, 글로벌 공급망은 인플레이션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과거에는 대체 항로가 부분적인 해결책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온전한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제 호르무즈 해협 문제는 단순히 '파이프라인을 몇 ㎞ 더 까느냐'의 차원을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인프라 구축이라는 물리적 해법보다 해협의 무기화를 실질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 안보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해협을 확보하는 비용이 대안을 마련하는 비용보다 비싸진 지금, 세계는 뒤늦게 전략적 요충지를 방치해온 뼈아픈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이인수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tjlee@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