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8명·경제장관 8개월…GDP 잠재성장률 절반 갉아먹은 10년의 대가
빈곤율 7.6%p 악화 속 후지모리 1위·결선행…6월 7일이 '경제 운명의 날’
빈곤율 7.6%p 악화 속 후지모리 1위·결선행…6월 7일이 '경제 운명의 날’
이미지 확대보기금과 구리 국제 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중앙은행은 남미에서 손꼽히는 안정적 운용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도 경제성장률은 잠재력의 절반에 머문다. 해답은 정치에 있다.
영국 BBC는 지난 9일(현지시각) 페루의 만성적 정치 불안이 탄탄한 거시경제 기초체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집중 보도했다. 그리고 나흘 뒤인 12일(현지시각), 페루 유권자들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새 대통령을 뽑기 위해 투표소로 향했다.
광물 호황에도 성장률 2.3%…"예측 가능한 정부만 있었어도"
페루 경제의 잠재력은 수치로 증명된다. 21세기 첫 20년간 GDP 성장률은 해마다 평균 4%를 웃돌았고, 일부 연도에는 10%를 넘기도 했다.
구리·금 세계 주요 생산국이라는 자원 기반, 헌법이 독립성을 보장하는 중앙은행(BCRP)의 안정적 운용, 법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한 외국인 투자 유입이 삼각 편대를 이뤄 성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2018년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전 대통령 사임을 시작으로 '대통령 회전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후 8년 사이 대통령이 8명 바뀌었고, 경제장관 평균 재임 기간은 7~8개월로 쪼그라들었다.
페루 경제연구소(IPE) 소장이자 BCRP 이사인 디에고 마세라는 BBC에 "2022년 이후 평균 성장률은 2.3%로 잠재성장력을 크게 밑돌고 있다"고 밝혔다.
기회손실의 규모는 구체적이다. 마세라 소장은 "현재의 금·구리 국제 가격과 거시 안정성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고 유능한 정부만 있었어도 성장률은 4.5%를 거뜬히 웃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페루 사회연구센터(CPES)의 아르만도 멘도사 경제학자 역시 "지속 가능한 경제 정책이 뒷받침됐다면 5~6% 성장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페루 경제는 자동 조종 장치에 기댄 좀비 상태"라고 진단했다.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 몫이었다. 빈곤율은 2019년 20%에서 2024년 27.6%로 7.6%포인트 높아졌다. 실질 임금은 2024년에야 겨우 2019년 수준을 되찾았다.
정치 충격이 극에 달했던 2023년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헌정 쿠데타 시도와 전국 시위에는 GDP가 0.55% 역성장했다. 멘도사 경제학자는 "2023년은 정치 혼란이 경제에 직격탄을 날린 교과서 사례"라고 평가했다.
수십 년의 기획이 필요한 분야는 충격이 더 깊다. 현재 페루에서는 태양광·풍력 발전 프로젝트 약 442억 솔(약 19조 원) 규모가 보류 상태다.
마세라 소장은 "장관과 그 팀이 몇 달마다 바뀌는데 어떻게 중장기 계획을 세우겠느냐"고 반문했다. 불법 광업 손실도 심각하다. 지난해 불법 금 수출 추정액만 115억 달러(약 16조 9000억 원)—2014년 페루 농식품 전체 수출액과 맞먹는 규모다.
대선도 혼돈 속으로…후지모리 1위, 결선은 6월 7일
지난 12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그 자체가 페루 정치 혼란의 축소판이었다.
개표율 54% 시점에서 케이코 후지모리(50·국민의힘당)가 17%로 선두를 달렸고, 극우 라파엘 로페스 알리아가(국민혁신당)가 15%, 중도좌파 호르헤 니에토가 14%로 뒤를 이었다. 35명의 후보가 난립한 탓에 과반 달성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결선은 6월 7일로 확정됐다.
투표소 자재 미배달로 리마 일부 투표소가 제때 문을 열지 못하는 운영 차질이 빚어졌고, 로페스 알리아가 측은 근거 없이 '대규모 선거 부정'을 주장하며 지지자들에게 거리 시위를 촉구했다. 검찰은 선거관리기관을 압수 수색하는 사태로 번졌다.
페루 최대 민간 경제단체인 CONFIEP는 "이번 혼란이 대통령 선거뿐 아니라 상원과 다른 공직 선거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 성명을 냈다.
컨설팅사 테네오의 니콜라스 왓슨 대표는 "2위권을 아슬아슬하게 놓친 후보들은 운영 차질 때문에 결선 진출 기회를 빼앗겼다고 주장할 빌미를 얻게 된다"고 언급했다.
그나마 숨통은 하나 트였다. 이번 총선부터 34년 만에 상원 60석·하원 130석의 양원제가 부활했다. 단원제 아래서 의회가 '도덕적 무능' 조항 하나로 대통령을 손쉽게 탄핵해 온 구조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다.
다만 의석이 극도로 파편화될 가능성이 높아 신임 대통령이 안정 다수를 확보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 배터리·광물 공급망과 맞닿은 문제
한국입장에서 페루의 정치 안정은 남의 일이 아니다. 페루는 구리·아연 등 핵심 광물 생산 세계 상위권 국가로, 한국 배터리·반도체 산업의 원자재 조달 경로와 직결된다.
페루 정치 불안이 광업 투자를 억누를수록 공급 차질 위험과 조달 비용 상승 압력이 커진다는 점에서 6월 결선 결과는 서울 여의도에서도 주목할 변수다.
페루 중앙은행은 올해 GDP 성장률을 2.9%로 전망한다. 남미 2위 성장 속도지만 잠재력과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멘도사 경제학자는 "국가 일부가 조직범죄에 포획됐다"며 "이제는 단순 부패를 넘어선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중앙은행 이사회 교체도 변수다. 마세라 소장은 "20년간 거시 안정을 이끈 훌리오 벨라르데 총재 연임 여부가 핵심 관건"이라며 이 결정이 신임 대통령과 의회 몫임을 상기시켰다.
6월 7일 결선에서 페루 유권자가 누구를 선택하든, 새 대통령 앞에는 같은 청구서가 기다린다.
좀비 경제의 자동 조종 장치를 끄고 수동 운전대를 잡는 것으로 10년의 정치 소용돌이가 쌓아 올린 그 청구서의 액수는 성장률 2~3%포인트, 빈곤율 7.6%포인트, 그리고 수천만 페루 시민의 잃어버린 기회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