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형' 버리고 '모듈식 기성품' 선호… 유럽 방산 조달 패러다임 전환
군함 생산 라인 단절된 서구권의 한계, 표준화 앞세운 한국 조선사 부상
군함 생산 라인 단절된 서구권의 한계, 표준화 앞세운 한국 조선사 부상
이미지 확대보기독일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로 추진하던 군함 건조 프로젝트를 전격 철회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독일 국방부가 152억 유로(약 22조 6000억 원) 규모의 F126 호위함 6척 도입 계획을 취소했다고 2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독일 정부는 설계가 복잡한 맞춤형 군함 대신 납기가 빠르고 검증된 기성 플랫폼을 사기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 결정은 유럽 방산 시장의 조달 패러다임이 '성능 극대화'에서 '속도와 가용성 극대화'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비용·납기 지연에 발목 잡힌 '바다의 공룡'
독일 해군이 당초 도입하려던 F126 호위함은 대형 함정으로 기대를 모았다. 2020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대함·대공·대잠 전을 모두 수행하는 만능 함정을 목표로 삼았다. 이 프로젝트의 주사업자는 네덜란드 조선사 다멘(DSNS)과 독일 조선 컨소시엄이 맡았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설계와 복잡한 공정이 발목을 잡았다. 주사업자인 다멘은 약속한 예산과 납기를 맞추지 못했고, 인도 시기는 2033년까지 밀렸다. 독일 국방부는 사업권 이관 등 다양한 돌파구를 모색했으나, 그 과정에서 총사업비가 초기 100억 유로에서 180억 유로(약 26조 8000억 원)로 두 배 가까이 불어난다는 계산이 나왔다. 의회의 예산 거부 우려가 커지자 베를린은 결국 사업 철회라는 결단을 내렸다.
성능 극대화에서 전력 가용성 중심으로… 조달 구조의 격변
독일 국방부는 대안으로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즈(TKMS)의 MEKO A-200 호위함 8척을 구매하기로 했다. 첫 4척에 63억 유로, 추가 4척에 53억 유로를 쓰는 조건이다. 척당 비용을 따지면 F126의 절반 수준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사 전략 우선순위는 완전히 바뀌었다. 과거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 성능을 극대화하는 '장기 조달(long-cycle procurement)' 방식이 주를 이뤘으나, 이제는 3~5년 내에 전력화를 마치는 '전력 가용성 극대화(availability-driven procurement)'가 핵심이다. 전시 동원 속도를 맞추려면 맞춤형 설계보다 재고(ready stock) 개념이 강화된 모듈식 기성품(off-the-shelf) 체계 확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흑해함대의 대형 함정들이 드론 공격에 무력하게 침몰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 장성들은 드론 시대에 덩치만 큰 비싼 군함은 좋은 표적일 뿐이라고 진단한다. 독일 해군은 원거리 원정용 군함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본토 앞바다를 지킬 대잠수함 함정을 빠르게 확보하는 실리를 택했다. TKMS 측은 검증된 모델인 만큼 오는 2029년에 첫 함정을 인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생산 단절된 유럽의 한계… 표준화 앞세운 K-조선 부상
특히 상선 기반의 뛰어난 생산성과 표준화된 설계, 블록 건조 능력을 보유한 한국 조선사들의 경쟁력이 주목받는다. 수상함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는 HD현대중공업과 잠수함 및 수상함 전반의 포트폴리오를 갖춘 한화오션, 경량함정 부문에서 기동성을 발휘하는 HJ중공업 등이 대표적이다. 현실적인 진입 시나리오로는 직접 수주 방식에 앞서 현지 조선소와의 협력을 통한 '설계·모듈 공급'이나 NATO 회원국 간 '공동개발 및 라이선스 생산' 모델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국내 방산업계 관계자는 "유럽 해군 시장은 전통적으로 진입 장벽이 높았으나 안보 위기가 고조되면서 납기 준수 역량이 최우선 지표로 부상했다"며 "지상 방산에서 입증한 한국의 신속한 공급망 관리 능력이 해상 무기 체계에서도 대안으로 주목받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시장이 던진 경고장… 투자자가 봐야 할 세 가지 트리거
베를린의 전격적인 군함 프로젝트 철회는 화려한 사양보다 '강력한 현물 조달'을 원하는 글로벌 방산 시장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복잡한 독점 기술을 고집하다 예산과 시일을 모두 놓치는 과거의 조달 방식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유럽 방산 시장의 지형 개편 속에서 투자자와 업계 관계자들은 공급망의 실질적 가동 속도에 주목해야 한다. 향후 투자 판단을 위한 세 가지 핵심 체크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럽 해군의 발주 방식이 맞춤형 플랫폼에서 기성 플랫폼 확대로 전환되는지 여부다. 설계 유연성보다 대량 생산과 비용 절감이 우선되는지 지표를 확인해야 한다.
둘째, 신규 군함 입찰에서 성능 점수보다 납기 준수 여부에 대한 배점이 증가하는지 추이다. 서구권 조선소의 고질적인 지연 문제를 파고들 수 있는 핵심 변수다.
셋째, 한국 조선사의 첫 유럽 해군 관련 수주나 현지 조선소와의 전략적 공동개발·라이선스 계약 등 구체적인 협력 사례가 발생하는지 시점이다. 이 트리거가 확인될 때 K-조선의 해상 방산 영토 확장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