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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혔던 발동기가 토해내는 사연들…과거와 오늘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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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혔던 발동기가 토해내는 사연들…과거와 오늘을 잇는다

고원재 철 스크랩 회사 '블루카이로스' 대표
영국, 유럽, 일본의 발동기를 구하고 한국의 발동기와 함께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고원재 블루카이로스 사장이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이미지 확대보기
영국, 유럽, 일본의 발동기를 구하고 한국의 발동기와 함께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고원재 블루카이로스 사장이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철 스크랩 집하장에 발동기가 고철로 취급되면서 굴러다녔다. 이 발동기를 가져다 분해했다. 닦고, 두드리고, 녹을 털어낸 끝에 발동기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부활시켰다.

“죽었던 발동기가 다시 살아나자 행복감이 몰려왔습니다. 철 스크랩을 비즈니스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문득 오래된 발동기를 재생시켜 당대의 이야기를 소환하고 과거와 오늘을 잇는 산업 골동품으로 격상시킨다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 스크랩 회사 블루카이로스 고원재 대표의 말이다.

고원재 대표의 꿈과 열정은 그가 운영하는 철 스크랩 집하장에서 시작된다. 이곳 한켠에는 ‘고원재 트레저 하우스’(treasure house:寶庫)가 들어서 있다. 고원재 갤러리인 셈이다. 이곳의 문을 열면 건물 공간 바닥에는 아주 오래된 발동기들이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다. 벽으로 둘러싼 사각의 틀에는 그의 사진 작품과 사진 동아리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지난 10월 31일부터 오는 12월 31일까지 두 달 동안 사진 동아리 작가들의 작품과 발동기 전시회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내년 1월부터는 고원재 대표 개인의 사진전을 계획하고 있다.

전시된 발동기들은 영국산 발동기에서부터 일본, 유럽 등에서 만든 것들이다. 한국산 발동기도 보인다. 미국과 일본은 농경시대에 발동기를 가정 필수품으로 여겨 집집마다 보유했지만 한국은 마을에 고작 한 대 정도 있을 뿐이었다고 고원재 대표는 설명한다.
12월 31일까지 사진동아리 작품·발동기 전시회 개최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서 멈춰섰던 발동기 심장 부활
"시대별·역할별로 모아 산업 골동품의 가치 더할 것"

그리고 공간 한복판에는 큰 선박에서 선장이 사용하던 조타기(Wheel)와 무전기, 그리고 행사를 알릴 때 사용하는 나팔과 같이 생긴 선박용 휘슬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10대에 마도로스가 되려는 꿈을 꿨던 당시를 회상하며 마련한 도구(산업용 골동품)들이다.

바닥에 놓인 오래된 발동기들은 과거에 담당했던 책무를 자기들끼리 자랑하듯 고만고만하게 모여 있다. 오래된 발동기들은 처음부터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몸체를 완전히 분해하고, 닦고, 기름 친 뒤에야 가쁜 숨을 토해내며 움직였다.

발동기의 멈췄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이가 바로 고원재 대표이다. 철 스크랩장에서 운용되는 각종 기계를 완전히 소화하는 기술 덕분에 발동기의 재생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발동기에는 누대에 걸쳐 켜켜이 쌓인 수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다. 그 뉘앙스들, 분위기들, 그것들은 당시의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이야기들이다.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갑자기 발동기를 왜 수집하느냐는 질문에 고원재 대표는 “산업현장에서 풍상을 겪어온 것이 꼭 자신의 분신 같다”고 말한다. 그는 오래된 발동기에서 선조들이 땀을 흘리며 일했던 당시의 억센 일들이 빛바랜 필름처럼 떠오르고, 발동기의 둔탁한 가동 소리에서 인간적인 향기를 느낀다고 말한다. 10대에는 마도로스, 대학 시절엔 철학교수가 되려고 했으니 그는 발동기를 보면서 남다른 관점을 가졌을 것이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발동기는 동네에 하나 정도밖에 없었던 귀한 ‘엔진’이었다. 가뭄이 들어 거북 등처럼 갈라진 논밭에 물을 대려면 이웃 마을에서 발동기를 빌려다가 냇물을 겨우 뽑아 올렸고, 동네 사람들은 환호를 올렸다.
고원재 트레저 하우스에서는 오는 12월 31일까지 산업 골동품으로 부활한 발동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이미지 확대보기
고원재 트레저 하우스에서는 오는 12월 31일까지 산업 골동품으로 부활한 발동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설날 떡 방앗간 주인은 밀려드는 떡을 만드느라 진땀을 흘리면서 발동기 엔진을 직접 손으로 돌려야 했다. 엔진에 감겨 있던 긴 피대가 방앗간 2층 높이로 돌아가면서 떡을 찧어냈던 기억도 발동기가 있어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1950~60년대에 방직공장의 피대를 힘차게 돌렸던 원천도 발동기였다. 당시의 현장 근로자들은 맨손으로 발동기의 시동을 거느라 팔뚝에 힘줄을 튕겼을 것인데 그 주인공은 지금은 타계했을 것이다. 이렇게 산업사회를 호령하던 발동기의 이미지는 긴 노역을 끝내고, 지금은 블루카이로스의 전시관에서 스스로 맹렬했던 그때의 희망을 빛내고 있다.

“발동기를 산업 골동품으로 재해석한다면, 고작 몇 대의 발동기만을 수집해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고원재 대표는 일본의 전문 사이트를 방문하여 특별한 역사를 간직한 발동기들을 사들이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 유럽, 미국, 유럽 등지에서 수백 점의 발동기를 수집하고 시대별‧역할별로 모아 놓고 전시할 수 있을 때가 된다면 발동기가 산업 골동품이란 이름으로 존재 가치를 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0대부터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산업 골동품 수집이란 새로운 분야를 취미로 더하면서 전시공간도 확보했다. 철 스크랩 집하장 모서리에 건물을 지은 것이 바로 ‘고원재 트레저 하우스’이다. 고원재 대표는 지금 발동기에 담긴 스토리텔링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를 독려하고 지원하는 이는 독일 유학파 철학자 유헌식 단국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다.

고원재 대표는 블루카이로스라는 고철 리사이클링 업체를 운영하는 오너이다. 현대제철과 포스코를 비롯해서 국내 주요 전기로 메이커에 연간 3만~3만5000톤 정도의 철 스크랩을 납품하고 있다. 그는 본업과 취미생활을 잘 활용하는 기업인으로 정평이 났다. 취미 활동은 프로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사진작가로 활동한 지는 약 20년 됐다.

그가 국내 유일의 ‘라운드 샷’ 카메라로 촬영한 설악산 권금성의 소나무 사진은 페럼타워(동국제강본사) 27층에 걸려 있고, 럭스틸 강판에 프린팅되어 브라질 룰라 대통령과 지우마 전 대통령에게 선물로 전달되었다. 브라질 포르탈레자 주정부 외빈 접견실에도 그의 대형 소나무 사진(가로 2.8m×세로 1.5m)이 걸려 있다. 현대 고(故) 정주영 회장의 추모식에 그의 소나무 사진이 초청 전시되기도 했다.
블루카이로스 고원재 사장이 닦고, 두드리고, 녹을 털어낸 끝에 새로운 생명을 얻은 발동기.이미지 확대보기
블루카이로스 고원재 사장이 닦고, 두드리고, 녹을 털어낸 끝에 새로운 생명을 얻은 발동기.


고원재 대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산업 부산물의 수집을 통해 당대의 역사의식과 “아 그랬구나” 하는 삶의 흔적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에 진력하는 중이다.

“20세기 산업 골동품의 역사, 특히 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그리고 많은 산업 골동품이 모였을 때 전시회를 할 예정입니다.” 고원재 사장의 끝말이다. “별을 보면 다시 예술의 꿈을 꾸게 된다”고 했던 반 고흐의 어록을 보고 난 뒤 고원재 사장은 산업 골동품에 더욱 몰입했다고 한다.

고원재 사장은 새로운 것들이 가슴을 설레게 할 때마다, 때로는 업으로, 때로는 취미로 곁에 두고 있다. “일과 취미를 병행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고원재 사장의 말 속에서 그의 행복 찾기가 어떻게 진전될지 더욱 궁금해진다.


김종대 글로벌철강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