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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한성렬의 힐링마음산책 (50회)] 억압으로 경직된 삶이냐, 억제로 성숙한 삶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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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한성렬의 힐링마음산책 (50회)] 억압으로 경직된 삶이냐, 억제로 성숙한 삶이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긍정심리학의 최고 권위자

욕구와 양심이 맞서는 상황에서


자아는 양심과 손을 잡고…


우리는 욕구를 무의식 속에 가둬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만 ‘양심(良心)’이 있다. 양심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만 자신이나 타인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 처벌하는 능력이 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비난하지만, 개나 고양이 등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원래 동물에게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은 생활하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잘 했다”고 칭찬을 받거나 혹은 “잘 못했다”고 처벌받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우리 마음속에 내재화된 사회적 규범이다. 따라서 양심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양심이 형성되면 다른 사람이 칭찬하거나 처벌하기 전에 자신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합당한 판결을 내린다.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다 못했을 때 비록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해야 할 목표를 달성하거나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는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해진다.

욕구와 양심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 마음이 편하고 갈등이 없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자주 욕구와 양심은 서로 대립한다. 예를 들면, 욕구는 배가 고프니 앞에 있는 빵을 먹고 싶어하지만 양심은 그 빵은 남의 것이니 허락 없이 먹으면 안 된다고 제지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쉽게 결정할 수 없게 되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불안해진다. 시간이 지나 배가 더 고파지면 빵을 먹고 싶은 욕구는 더 강해진다. 만약 욕구가 양심보다 더 강할 경우 우리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아마 빵을 먹을 것이다. 물론 처벌이 따른다.

양심에 따르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는 경험이 쌓이다보면 점점 양심의 강도가 강해지고 따라서 양심의 명령도 강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아는 욕구를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양심을 따를 수도 없게 된다. 자아가 충분히 성숙했다면, 합리적으로 해결할 때까지 욕구의 만족을 지연시키면서 동시에 양심의 명령도 어기지 않으면서 현실적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많은 성인들이 그 정도로 자아가 성숙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욕구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동시에 양심도 어길 수 없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불안해진다. 이런 상황이 심해서 일상적인 생활을 해가기가 어려워지면 ‘신경증’이라고 부른다.

▲본능억압의갈등을표현한연극'에쿠우스'.연극'에쿠우스'는영화'아마데우스'의원작자로유명한극작가피터쉐퍼의동명희곡을원작으로한작품으로영국에서의초연이후파격적인소재와수위높은노출등으로세계적인센세이션을불러일으켰다.이미지 확대보기
▲본능억압의갈등을표현한연극'에쿠우스'.연극'에쿠우스'는영화'아마데우스'의원작자로유명한극작가피터쉐퍼의동명희곡을원작으로한작품으로영국에서의초연이후파격적인소재와수위높은노출등으로세계적인센세이션을불러일으켰다.
결국 지나친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아는 양심과 손을 잡고 욕구를 억누르고 은폐하는 방향으로 문재를 해결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욕구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양심을 따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욕구를 따르는 결과는 처벌이라는 것을 이미 익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욕구와 양심이 서로 대립되는 상황에서 우리들은 대부분 욕구를 무의식 속에 가두어두고 의식하지 못하는 책략을 사용한다. 이런 책략을 ‘억압’이라고 부른다. 배고픈 것을 의식하지 못하니까 남의 빵을 훔칠 필요도 없게 된다. 당연히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다.

이성(異姓)과 함께 있는 경우, 성적 욕구가 일어났다고 해서 즉시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상대방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행동으로 옮기면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저지르게 되고, 그 결과는 당연히 큰 처벌을 받게 된다. 생리적인 욕구는 사회적 규범과 양심에 저촉이 안 되는 행동을 통해 만족되어야 한다.

하지만 욕구를 느끼지만 행동을 안 하고 참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럴 경우, 성적 욕구 자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된다. 즉, 욕구를 억압하면 된다. 성욕을 의식하지 않으니 행동할 필요도 없게 된다.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결과를 살펴보면 억압의 기능을 알 수 있다. 남녀 대학생들에게 성과 관련된 행위를 노골적으로 하는 영상을 똑같이 보여준 후, 동성의 연구자가 영상을 보는 동안 성욕을 느꼈는지의 여부에 대해 질문했다. 거의 모든 남자 대학생이 성욕을 느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여자 대학생이 성욕을 느끼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즉, 상당수의 여자 대학생은 ‘억압’을 했기 때문에 성욕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생리적인 변화를 측정하는 장치를 통해 이 여학생들도 성욕을 느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리적으로는 분명히 성욕이 일어났는데 심리적으로는 의식을 하지 못했다. 이런 것을 억압이라고 한다.

억압을 한 여학생과 하지 않은 여학생과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할까? 물론 답은 억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억압’도 공짜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 대가가 있다. 욕구는 끊임없이 의식으로 떠오르려고 한다. 그래야 자아가 욕구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고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오르려고 하는 욕구를 무의식속에 억압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에너지는 더욱 더 많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억누르는 욕구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다양한 활동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모든 활동에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심을 따르기 위해 욕구를 억누르는 데 에너지가 많이 사용된다면, 그만큼 다른 활동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들게 된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전체 에너지를 x, 억압에 사용된 에너지를 y, 남은 에너지를 z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공식이 만들어진다. 즉, x­y=z이다. x는 일정하기 때문에 y가 커지면 커질수록 z는 적어진다. 반대로 y가 적어지면 질수록 z는 커진다. 억압을 많이 하는 사람은 경직된 삶을 살아가게 되고 ‘모범생’으로 살 수는 있다. 하지만 재미있고 활동적인 삶을 살 수는 없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세 학생이 시험을 보고 있다고 하자. 그 중 A는 아무 고민 없이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B는 15분동안 부정행위를 할지말지에 대해 고민하다 결국 안 했다. C는 30분 동안 고민하다가 안 했다. 세 학생이 결국 모두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후 “부정행위가 얼마나 나쁘냐?”고 물어보면, 위 세 학생 중에 누가 제일 나쁘다고 생각할까? 쉽게 생각하면 아무 고민도 안한 A가 답일 것 같지만 정답은 C이다.

▲세계난민의날(6월20일)을앞두고지난6월14일서울중구통일로서울역광장에서피난처-난민인권센터(NANCEN,난센)등난민단체연합과청소년들이난민주간로고가새겨진우산을들고‘억압과박해에서난민을보호하고함께어우러져살자’는의미의플래시몹을하고있다.이미지 확대보기
▲세계난민의날(6월20일)을앞두고지난6월14일서울중구통일로서울역광장에서피난처-난민인권센터(NANCEN,난센)등난민단체연합과청소년들이난민주간로고가새겨진우산을들고‘억압과박해에서난민을보호하고함께어우러져살자’는의미의플래시몹을하고있다.
부정행위가 나쁘다고 비난하는 정도는 고민한 시간에 비례한다. 즉 고민을 많이 했으면 했을수록 더 나쁘게 느껴진다. 간단히 설명하면,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것은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안 했다면 그만큼 나쁜 것이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유혹이 강해지고, 할지말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안 했다면 그만큼 부정행위는 나쁜 것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결국 하지 않은 자신의 결정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이 의식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억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결국 욕구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양심의 명령에 따라 무의식으로 억압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억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학생을 무의식적으로 미워하는 교사는 학생을 미워한다고 교무실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동료교사를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비난하게 된다. 물론 자신도 학생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 한다.

이런 예는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부모를 무의식적으로 미워하는 자녀는 공개적으로 부모를 미워하는 사람을 보면 “부모를 미워하다니 인간도 아니다”라고 강하게 비난한다. 사정에 따라서는 부모를 미워할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렇다. 대낮에 카바레에 가서 춤을 추는 가정주부에 대한 기사를 보면 일반적으로 남편보다는 부인들이 “나쁜 여편네들”이라고 더 강하게 비난한다. 아마도 그 부인들의 무의식 속에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가정주부들처럼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추고 싶은 욕망이 억압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떤 욕구에 대해 억압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날 칠 정도로 필요 이상으로 비난하고 분개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화가 나거나 분노를 느낀다고 다 그 욕구가 억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혹시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특정 행동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화가 나고 분노하게 된다면 혹시 억압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세심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억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비난과 분노도 강해진다. 또 억압의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비난할 대상도 많아진다.

감정이나 욕구를 억압하기 보다는 ‘억제’를 해야 한다. 억제는 욕구를 의식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다. 자신도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억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억압하면서 경직된 삶을 사는 것보다 의식하면서 자제하는 것이 성숙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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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열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