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는 그리스도교가 각 수도원을 중심으로 인생만사의 중심에 있던 신정시대였다. 그들은 생활·정치와 연계되면서 인간의 죽음까지 관장하는 막강한 권력을 유지했다. 십자군전쟁(1092년∼1272년) 배경에는 610년 마호메트의 이슬람 성장이 있었지만, 또 다른 배경에는 농업 발달과 인구 증가로 교회의 재산탐닉과 부정부패에 의한 세속화에 있었다.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특히, 전쟁자금이 부족하면서 시장세, 통행세, 관세 등과 제후들은 후추와 향신료를 구입하고 세금을 뜯기 위해 상업도시를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상인들에게 ‘자유도시’ 자치권을 주게 되면서 부르주아가 탄생케 된다. 더 큰 문제는 1346년 이후 흑사병과 기근, 전쟁으로 유럽인구 절반가량이 사망하면서 하나님에게 진노를 달래는 채찍질고행과 유태인학살의 만행까지 저지르게 된다.
유럽 각국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중세 가톨릭교회는 쇠퇴되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과는 다르게 신도의 기증 등으로 교회와 성직자들이 토지와 재물을 가지게 되면서 재산을 불리고 사치에 빠지게 되었다. 루터의 고백처럼 당시는 온갖 미신적인 요소와 유물숭배가 성행하였다. 흑사병으로 인한 채찍질 고행에서 쇠퇴한 왕실과 부패한 교회, 가혹한 세금으로 농민을 괴롭히는 영주들로 이어지면서 종말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넘쳤다. 따라서 청빈•순결•순종과 성직매매와 성직자 결혼금지의 ‘수도원운동’ 등이 일어났지만, 대세를 막지 못했다. 루터는 사제만이 가지는 구원기능과 로마교회 경건과 위선을 비난하고, 하나님만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믿음만으로, 은혜만으로, 성서만으로!(sola fide, sola gracia, sola scriptura)”라는 말하면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게 되었다.
1483년 구리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가 수도사에서 박사학위와 교수까지의 사건은 중세의 사회현상적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다양한 사회적 체험과 다양한 시련은 그 시대적인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이 가지는 자유란 민주주의 가치체제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최고의 가치다. 인간들은 어떠한 시대적인 외부억압이나 불평등에 의한 구속과 착취들이 있을 때는 자유의 한계성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대중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하면서 자유•민주의 한계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루터는 1520년 ‘그리스도인의 자유(Freiheit von eines Christenmenschen)’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만물에게 예속된다”고 하는 대명제를 만들었다.
임실근 한국스마트유통물류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