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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이해찬 종부세 강화해야, 노무현 참여정부 실패의 기억 …헨리 조지 지대이론 vs 문재인 종합부동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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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이해찬 종부세 강화해야, 노무현 참여정부 실패의 기억 …헨리 조지 지대이론 vs 문재인 종합부동산세

[김박사 진단] 이해찬의 종부세 강화해야,  노무현 정부 실패의 기억 …헨리 조지 지대이론 vs 문재인 종합부동산세 이미지 확대보기
[김박사 진단] 이해찬의 종부세 강화해야, 노무현 정부 실패의 기억 …헨리 조지 지대이론 vs 문재인 종합부동산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 김대호 소장/ 경제학 박사]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종부세 강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해찬 대표는 30일 취임후 처음으로 열린 당정청 회의에서 종부세를 대폭 강화해 달라고 청와대와 정부에 요청했다.
종부세는 문재인 정부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가 처음 만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종합부동산세’라는 것을 내놓았다.

이를 흔히 줄여 종부세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가구당 보유부동산의 가치가 6억 원 이상이면 재산세와 별도로 또 다른 세금을 누진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 종합부동산세 즉 종부세의 이론적 근거가 바로 헨리 조지로 부터 왔다.

헨리 조지는 1879년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을 펴냈다.
영어 제목은 ‘Progress and Poverty’이다.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져도 지대가 더 빠른 속도로 올라 다수 대중을 극심한 가난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의 내용이다.

헨리 조지는 그 대안으로 토지가치 상승분은 모조리 세금으로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헨리 조지가 말하는 토지가치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헨리 조지의 진보와 가난이라는 책을 유난히 탐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가장 존경하는 경제학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헨리 조지라고 대답한 적도 여러 번이다.

노무현의 헨리 조지 사랑이 종부세 도입으로 이어진 것이다.

종부세는 참 말도 많고 사연도 많았다.

2003년 처음 입안 되었으나 국회 심의 과정에서 여야 마찰로 2년이나 늦어져 2005년에 와서야 법안으로 확정됐다.

이후에도 헌법소원과 헌법재판소의 일부 위헌 및 헌법불합치 판결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금의 종부세는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구상한 것에 비한다면 사실상 누더기가 되어 있다.

헨리 조지는 130년 전의 사람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는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대학 운동권에서 주로 읽혔다.

종부세에 대해서는 국민적 저항이 컸다. 보유세로서의 재산세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징벌적 이중과세 또는 가진 자를 저주하는 부동산 세금폭탄이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당시 한 론조사에서 반대가 62.7%로 찬성 25.7%의 거의 3배에 달했다. 노무현 정부는 그래도 강행했다.

종부세 도입 이후 총선에서 참여정부의 텃밭이던 서울과 수도권의 의석을 대부분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 당에 빼앗겼다.

2007년 대선에서도 이명박 후보는 종부세 공격을 앞세워 정동영 후보를 압도하기에 이른다.

종부세 강행을 참여정부 민심이탈의 요인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문재인 정부에게도 종부세는 일종의 트라우마이자 아킬레스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후 국민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종부세 인상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종부세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헨리조지는 뉴욕의 한 허름한 인쇄소에서 활자 뽑는 노동자였다.

1830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하층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공회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다가 중2로 중퇴한 것이 한평생 학력의 전부다.

골드러시 시절 서부로 넘어갔다.

캘리포니아에서의 도전은 녹록치 않았다.

금을 캐고 싶어도 땅이 없었다.

적은 밑천으로는 광산에 접근조차 힘들었다. 될성부른 땅은 대부분 소수의 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운 좋게 금을 캐내도 지주에게 임대료를 내고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철도가 뚫린 이후 땅값은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다.

철도역이 들어선 이른바 역세권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헨리 조지는 결국 금 대박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기위해 캘리포니아에서도 다시 인쇄공으로 취업한다.

우여곡절 끝에 한 인쇄소를 인수하게 된다.

그 인쇄소 시설을 토대로 187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언론사업을 시작했다.

헨리 조지가 만든 신문의 이름은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포스트’이라는 자그마한 로컬 신문이다.

이 신문에서 발행인 겸 기자로 활약했다.

그 시절 토지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금을 찾아 대륙횡단철도를 탔던 수많은 서부개척자들의 꿈이 토지가격 상승 때문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처참한 현실을 특히 신랄하게 묘사했다.

헨리 조지는 점차 경제사상가로 변해 갔다. 급기야 1891년에는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을 펴내기에 이른다.

헨리 조지는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구조적 모순의 원인이 바로 토지의 지대에 있다고 갈파했다.

부의 상당부문이 경제적 지대라는 이름으로 토지 소유자와 독점 자본가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절대 다수 대중은 더 가난해 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이를 요즈음 경제학에서는 ‘렌트(rent) 부른다.

그 렌트 중에서도 헨리 조지는 특히 토지지대를 가장 나쁜 것으로 보았다,

헨리 조지는 그 모순을 해결하기위해서는 땅에 대해서는 공개념을 도입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토지공개념 논의는 이 헨리 조지의 땅에 대한 지대해소론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은 토지가치세로 집약될 수 있다.

토지의 가치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을 모두 세금으로 거두어들이자는 것이다.

토지 가격이 오른 이유가 토지 소유자의 노력과는 무관하며 철도개통과 같은 외부효과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 만큼 그 이익에 대해서는 모두 환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다른 세금은 전부 철폐하여 오로지 토지가치단일세 하나만으로 나라를 꾸려가자는 것이 헨리 조지의 구상이다.

종부세의 기본 구상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김대호 소장 /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