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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역사 속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이스라엘 지상군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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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역사 속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이스라엘 지상군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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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박사
국제 유가가 심상치 않다. 이스라엘의 지상군 파병과 이란의 참전 경고가 나오면서 국제 유가가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이른바 오일 쇼크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국제 유가의 급등은 가뜩이나 어려운 세계 경제를 결정적으로 뒤흔드는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가 상승 속에 경기마저 급강하 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다. 뉴욕증시는 이미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에 빠져들고 있다. 뉴욕증시 뿐 아니라 달러환율 국채금리 금값 그리고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등 가상 암호화폐도 오일쇼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뉴욕증시에서 닥터둠으로 통하는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충돌과 관련해 “시장이 중동에서 대규모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작게 보는 것 같다”고 경고했다. 루비니 교수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점령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며 “ 걸프만 원유 공급이 중단돼 유가가 급등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 충격을 촉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일 쇼크란 국제 유가가 단기간에 급격히 올라 세계 경제에 충격을 현상을 말한다. 1973∼1974년 중동 전쟁 당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과 1978∼1980년의 이란 혁명으로 인한 석유 생산의 대폭 감축을 석유의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국제 석유 가격이 급상승하고, 그 결과 전 세계가 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겪은 사건을 바로 오일쇼크이다.

그동안 오일 쇼크는 두 번 있었다. 제 1차 오닐 쇼크는 1974년 1월 1일의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 수출 가격은 사우디아라비아 기본유종(아라비안 라이트 34도)을 기준으로 배럴당 11.65달러로 고시하면서 발발했다. 이 시세는 1973년 10월 수준의 4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1차 오일 쇼크는 1973년 10월 6일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제4차 중동전쟁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 전쟁은 1967년의 6월 전쟁 당시 잃었던 시나이 반도의 탈환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2차 석유 파동은 1978년 10월부터 1981년 12월 사이에 터졌다, 1978년 12월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서 개최된 석유수출국기구 OPEC 총회가 1979년 원유의 공식가격을 14.55달러로 인상할 것을 결의 하면서 촉발됐다. 제2차 석유파동은 1978년부터 시작된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8년 10월부터 가열된 이란의 정치소요는 점차 전국적 규모의 유혈폭동사태로 발전했다. 세계 제2위의 석유수출국인 이란은 그 해 12월 27일에 전면적인 대외 석유금수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란의 이 같은 돌연한 수출의 중단은 제1차 석유 위기 이상의 충격과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로 세계 경제는 뿌리채 흔들렸다. 이때 나온 말이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원유 가격은 1973년 10월과 1974년 1월의 인상조치로 약 4배 가까이 급등하였다. 세계경제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져 1975년에는 서방 선진국은 마이너스성장을 하게 되었다. 제2차 석유파동 기간인 1978년 12월부터 1980년 7월 사이에 석유가격은 배럴당 12.9달러에서 31.5달러로 급등했다. 생산비용의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다. 세계 각국의 성장률은 둔화되었으며 무역수지는 악화되었고, 국제금융과 통화질서는 교란되었다.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불황 속의 물가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나타났다. 1975년 소비자 물가는 전년 대비 무려 24.7% 상승하였다. 국제수지는 18.9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정부는 1973년부터 경제성장과 수출신장의 한계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돌파한다면서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중화학공업정책을 강행하여 경제규모의 확대에 몰두하던 중 제2차 석유파동을 맞게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요인으로도 지적되고 있다.

제1차 오일 쇼크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부 장관이었던 아메드 자키 야마니였다. 그는 매월 5%만 감산해도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 들어가 1배럴 당 2.9달러였던 원유가는 한 달 만에 12달러에 이르렀다. 이 석유 무기화 전략으로 아랍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일본과 유럽공동체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 정권의 한국도 1973년 12월 17일 아랍을 지지한 적이 있다.
중동과 베네수엘라, 가봉 등의 산유국들은 말 그대로 역사적인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 중 하나였던 소련도 꽤나 쏠쏠하게 이득을 보았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중동의 석유 감산은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1974년 3월이나 되어서야 감산을 중단했다. 1차 오일 쇼크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스윙 프로듀서 즉 석유 시장 질서 주도국의 지위를 얻었다. 이를 주도한 아메드 자키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부 장관은 이후 미스터 오일, 석유 황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었던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그를 경질할 때까지 석유 수출국 기구(OPEC)와 세계석유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2차 석유 파동의 직접적 원인은 1979년 이란 혁명이다. 이란은 1978년 12월 당시 혁명으로 인한 파업으로 하루 6백만 배럴 분량에 달했던 석유 생산량을 2백만 배럴까지 축소했다. 혁명 직후에는 또 다른 산유국이었던 소련이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여파를 차단하기 위해 이웃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권을 지원하여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다. 이듬해에는 이라크의 이란 침공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불과 몇 달 만에 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선까지 치솟았다.

이로 인해 물가는 상승하면서 실업 등의 문제는 오히려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급작스럽게 불어난 달러를 미국 은행으로 회수하기 위해 금리를 21%까지 인상했다. 그 바람에 미국에 잔뜩 외채를 끌어다 국내의 산업화를 진행하고 있던 대한민국은 빚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