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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작지만 아주 특별한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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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작지만 아주 특별한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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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간송옛집’은 내가 자주 즐겨 찾는 곳 중 하나다.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사 온 뒤로 지척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는 이유도 있지만, 산 들머리에 있어 산을 오르거나 숲을 찾아갈 때면 으레 한 번씩 들르는 최애의 장소가 되었다. 간송옛집은 조선 최고 부호였던 간송 부친이 전국 물산을 관리하고 보관하던 창고로 지었는데, 간송이 부친의 제사를 지낼 때 부속 시설로 사용하다 한국전쟁 때 훼손되어 한동안 폐가처럼 방치되기도 했다. 간송이 세상을 뜬 뒤 종로4가의 본가를 철거하면서 나온 자재로 도봉구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전통 한옥으로 복원·단장해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21호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으로 등재됐다. 간송옛집 담장 왼쪽엔 간송 전형필과 그의 부친 묘가 함께 있다. 일제 강점기 사재를 털어 민족 문화재를 지켜낸 문화독립운동가였던 간송의 문화보국 정신을 기리는 작지만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간송옛집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간송옛집은 조선 최고 부호의 저택이라기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정겹고 아담해 소박함마저 느껴진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ㄱ자 구조로 고졸하고 우아함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집도 사람을 닮는 것인가. 평생을 부귀영화만 누렸어도 짧았을 생을, 조선의 시서화와 문화재를 지키고 예술가를 아낌없이 후원했던 그의 삶을 닮은 듯하다. 그가 아니었다면 훈민정음해례본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도, 추사의 글씨도, 신윤복의 혜원전신첩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나 고려청자·조선백자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체취가 배어 있는 간송옛집은 그냥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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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어여쁘지 않은 것은 없다. 전국 도처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끊이지 않는 시월의 그윽한 가을 정취 속에 간송옛집 뜨락을 수놓은 다양한 작품들이 투명한 가을볕 아래 다소곳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름하여 ‘간송야연, 솜씨 좋은 나날’. 특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간송이 지켜낸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겸재 정선,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 등의 그림을 한 땀 한 땀 수놓은 자수(刺繡) 작품으로 재현해 놓은 것들이다.

볕 바른 가을 뜨락에 놓인 작품들이 고풍스러운 한옥과 어울려 예사롭지 않은 멋이 느껴진다. 원화가 하나같이 손꼽히는 걸작들이어서 작품 하나하나를 찬찬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본다. 동호회 작품전이라서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림들을 찬찬히 감상하다 보니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변상벽의 ‘국정추묘’와 김홍도의 ‘황묘농접도’, 정선의 ‘추월한묘’ 등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또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고풍스러운 한옥이 지닌 공간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원작의 미를 새롭게 해석해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회원들의 정성이 담긴 자수 작품들이 가을꽃들과 한데 어우러져 꽃향기처럼 은근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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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따라 무리 지어 핀 흰 국화가 그윽한 가을 향기를 뜨락 가득 풀어놓고, 마당 가 꽃송이를 띄워놓은 작은 돌확 속엔 때 묻지 않은 청잣빛 가을 하늘이 한가득 담겨 있다.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어놓고 간송옛집의 솟을대문을 나서며 가만히 자문해본다. 저 작은 돌확도 파란 하늘을 담고 있는데 나는 가슴에 무엇을 품고 있는가. 해 아래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세월이 흘러도 잊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다. 간송 전형필과 그가 지켜낸 소중한 우리 문화재들이 그러하다. 그를 기리고 잊지 않기 위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을 그들의 정성이 새삼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간송이 다시 살아나 K-pop, 영화, 드라마 등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키며 문화강국으로 거듭난 지금의 우리나라를 본다면 얼마나 흐뭇하실까. 왠지 가을볕처럼 넉넉하고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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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