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옛집은 조선 최고 부호의 저택이라기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정겹고 아담해 소박함마저 느껴진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ㄱ자 구조로 고졸하고 우아함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집도 사람을 닮는 것인가. 평생을 부귀영화만 누렸어도 짧았을 생을, 조선의 시서화와 문화재를 지키고 예술가를 아낌없이 후원했던 그의 삶을 닮은 듯하다. 그가 아니었다면 훈민정음해례본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도, 추사의 글씨도, 신윤복의 혜원전신첩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나 고려청자·조선백자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체취가 배어 있는 간송옛집은 그냥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공간이다.
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어여쁘지 않은 것은 없다. 전국 도처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끊이지 않는 시월의 그윽한 가을 정취 속에 간송옛집 뜨락을 수놓은 다양한 작품들이 투명한 가을볕 아래 다소곳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름하여 ‘간송야연, 솜씨 좋은 나날’. 특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간송이 지켜낸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겸재 정선,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 등의 그림을 한 땀 한 땀 수놓은 자수(刺繡) 작품으로 재현해 놓은 것들이다.
볕 바른 가을 뜨락에 놓인 작품들이 고풍스러운 한옥과 어울려 예사롭지 않은 멋이 느껴진다. 원화가 하나같이 손꼽히는 걸작들이어서 작품 하나하나를 찬찬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본다. 동호회 작품전이라서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림들을 찬찬히 감상하다 보니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변상벽의 ‘국정추묘’와 김홍도의 ‘황묘농접도’, 정선의 ‘추월한묘’ 등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또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고풍스러운 한옥이 지닌 공간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원작의 미를 새롭게 해석해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회원들의 정성이 담긴 자수 작품들이 가을꽃들과 한데 어우러져 꽃향기처럼 은근하게 다가온다.
담장을 따라 무리 지어 핀 흰 국화가 그윽한 가을 향기를 뜨락 가득 풀어놓고, 마당 가 꽃송이를 띄워놓은 작은 돌확 속엔 때 묻지 않은 청잣빛 가을 하늘이 한가득 담겨 있다.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어놓고 간송옛집의 솟을대문을 나서며 가만히 자문해본다. 저 작은 돌확도 파란 하늘을 담고 있는데 나는 가슴에 무엇을 품고 있는가. 해 아래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세월이 흘러도 잊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다. 간송 전형필과 그가 지켜낸 소중한 우리 문화재들이 그러하다. 그를 기리고 잊지 않기 위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을 그들의 정성이 새삼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간송이 다시 살아나 K-pop, 영화, 드라마 등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키며 문화강국으로 거듭난 지금의 우리나라를 본다면 얼마나 흐뭇하실까. 왠지 가을볕처럼 넉넉하고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