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행복’의 경우, 외부적 요인도 분명히 있겠지만, 개인의 내부적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이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불확실한 미래는 불안정한 현재로부터 시작되고,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과거는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데에 한몫하고 있다. 그럴수록 제안되는 대안은 끊임없이 변하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요인들을 더 많이, 더 오래도록 확보하는 것에 잘못 몰입하는 것이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은 ‘받는 만큼만 일하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어떻게든 나를 증명하고, 내 한계를 확인하고 도전하는 것에 몰입하기 쉽고, 행복을 느끼기 쉬웠다면, 소위 짬이 찼다는 연차가 되고 나면 외부에서 오는 정신적·물질적 보상이 나의 열정을 지속하게 하는 기름이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을 것이다. 일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가장 적은 에너지로 주어진 업무를 해내는 사람이라고도 얘기한다. 언제부터인가 후자에 더 많은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수입을 얻기 위한 모든 과정과 요인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데, 우리는 과연 ‘받는 만큼’, ‘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구성원의 몰입과 행복에 대한 힌트가 조금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내부적 요인의 일환으로, 스스로의 시간당 몸값은 어떠한가?
앞서 언급된 ‘받는 만큼’은 나의 연봉으로, 이를 1년 52주, 주 40시간으로 나누어 보면 내가 회사로부터 받는, 회사가 내게 기대하는 최소 시간당 비용이 나온다. <A = 연봉 / 52(주) / 40(시간)> 이 비용을 산정하고 나면, 누군가는 죄책감을, 누군가는 억울함, 누군가는 동기가 부여됨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나의 한 시간이 고작 이 비용이었다고 생각하면, 나의 열정을 그토록 투자했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 것이다. 또 나의 한 시간이 이 비용씩이나 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나의 시간을 그만큼 소중히 여겼는지, 또 누군가 부여한 나의 가치에 대한 기대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창출한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이를 동일한 계산식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가치는 실제 내가 기여한 만큼의 수익일 수도 있고, 아직 수익화되지 않은 잠재적 가치일 수도 있다. 직무나 조직, 업계의 특성에 따라 가치에 대한 기준이 다를 것이기에 이는 개개인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선에서 책정해 보기를 권장한다. <B = 1년 동안 창출한 가치 / 52(주) / 40(시간)>
당신의 A와 B는 몇 배의 차이가 있는가? A와 B의 간극이 클수록 결국 개인의 몰입과 행복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업무적 특성에 따라서 적정 배율이 모두 다를 것이며, 심지어 우리 사회조차 다양한 직무를 공평하게 인정하고 보상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딘가에 속하여 시간에 따른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수입을 창출해야 하는 개인에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요인은 자신의 업에서 얻을 수 있는 A를 끊임없이 높이는 일일 것이다. 조금 더 정밀한 계산을 원한다면, A와 B를 비교할 때 내가 이 조직에서 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가적인 가치 역시 고려돼야 할 것이다.
• 당신의 A와 B는 합리적인가?
• 합리적이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스스로 A와 B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나아가 A를 증가시키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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