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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캐즘(Chasm)의 덫' 과 트럼프 '어젠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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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캐즘(Chasm)의 덫' 과 트럼프 '어젠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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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한때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던 전기차와 배터리가 주춤하고 있다. 뉴욕증시가 연일 상승 랠리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전기차와 배터리 관련 주가는 지지부진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전기차와 배터리가 '캐즘의 덫'에 걸려든 것 같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캐즘(Chasm)'이란 한동안 기대를 모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느닷없이 부진의 늪에 빠지는 현상이다. 인기 폭발의 최첨단기술 제품이 초기 시장에서 주류 시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구간을 의미한다. 이 캐즘 구간이 길어지면 시장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많은 제품이 캐즘을 넘지 못하고 도태되고 있다. 이 구간을 넘어서면 기술 범용화로 소비가 많이 늘어난다. 원래 캐즘은 지질학에서 지층 사이에 큰 틈이 생겨 서로 단절돼 있음을 뜻하는 용어였다. 1991년 미국 실리콘밸리의 컨설턴트 제프리 A. 무어가 자신의 저서 '크로싱 더 캐즘(Crossing the Chasm)'에서 학문적으로 언급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요즈음 전기차와 배터리의 부진이 바로 이 '캐즘의 덫'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미국의 완성차 업체인 스텔란티스를 이끌고 있는 카를로스 타바레스 CEO는 전기차가 캐즘의 덫에 빠져 공멸 위기를 맞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소비자들의 수요가 갑자기 줄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캐즘의 덫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테슬라와 BYD 등이 기술 혁신보다는 가격 인하의 무리수를 쓰면서 전기차와 배터리가 함께 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카를로스 타바레스 CEO는 가격 인하의 치킨 게임을 멈추지 않으면 전기차와 배터리가 피바다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캐즘의 덫은 포드 자동차에도 밀어닥치고 있다. 미국의 완성차 업체에서 전기차 전환에 가장 앞서 속도를 내던 포드는 최근 수요 부족으로 전기트럭 'F-150 라이트닝'을 생산하는 생산라인의 인력을 대폭 감원했다. 포드는 F-150 라이트닝 생산라인에서 모두 1400명을 해고한다고 밝혔다. F-150 라이트닝은 출시 당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직접 시승하며 “사고 싶은 차”라고 말했을 정도로 포드 전기차 전략의 핵심으로 꼽혀왔다. 최근 수년간 전기차 비중을 공격적으로 확대해왔던 세계 최대 렌터카 업체 허츠(Hertz)는 보유 전기차 2만여 대를 팔겠다고 밝혔다. 허츠가 보유한 전기차의 3분의 1을 처분하겠다는 것. 로이터는 모건스탠리 분석가의 말을 인용해 “허츠의 매각 움직임은 전기차에 대한 기대치가 낮춰져야 한다는 또 다른 신호”라고 짚었다. 일본차들도 전기차 인기 하락에 고심하고 있다. 토요타와 닛산 등은 미국에서 딜러들에게 지급하는 전기차 판매 장려금을 2배로 늘리며 판매 둔화세를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토요타는 아예 전기차 비중을 30% 이하로 줄이는 전략을 본격화했다. 아키오 토요타 회장은 한 비즈니스 행사에서 "아무리 전기차 전환이 진행되더라도 시장 점유율이 30%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머지 70%는 하이브리드차나 수소 전지차나 수소 엔진차 등이 차지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전기차는 충전 인프라 부족과 비싼 가격 등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수요 증가세가 둔화하고 있다"면서 전기차보다는 하이브리차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전기차 시장 둔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가격 장벽’이 꼽힌다. 카를로스 타바레스 스텔란티스 CEO는 “비싸다는 는 단점 때문에 전 세계 전기차 수요 성장세가 더디다”면서도 “실질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가격 인하를 지속하는 것은 ‘바닥을 향한 경쟁’이고 결국 ‘피바다(bloodbath)’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전기차 업체 BYD가 독일에서 아토3 등의 전기차 가격을 15% 내린 데 이어 테슬라도 중국과 독일 등 유럽에서 판매하는 모델 가격을 2.8%에서 9%까지 낮췄다. 지난해 초 테슬라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한 1차 가격 인하 전쟁에 이어 이번엔 BYD의 선공으로 다시 치킨 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부족한 충전소 인프라와 높은 수리 비용도 전기차의 앞날을 막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극 한파가 닥치면서 전기차 배터리의 방전 우려도 커졌다. 미국에 '북극 한파'가 덮쳐 중북부 지역의 체감온도가 영하 30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상당수 지역에서 전기차 테슬라가 방전·견인되는 사태가 속출한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은 "미국의 전기차 충전소들은 배터리 방전과 서로 대치하는 운전자들, 거리 밖으로 이어진 긴 줄로 인해 절망의 현장으로 변했다"고 전했다. 극도로 낮은 온도에서는 배터리 양극과 음극의 화학반응이 느려져 충전을 어렵게 만든다. 어바인 캘리포니아대학(UC어바인)의 기계공학 교수 잭 브로워는 "배터리로 구동되는 전기차를 매우 추운 환경에서 작동하기는 결국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추우면 배터리를 빨리 충전할 수 없는데,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 와중에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약진도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에 공포를 야기하고 있다. 공화당의 1등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 공약집인 어젠다 47에서 "미국의 세금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중국 배터리 회사들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정에너지 관련 투자를 줄이고 화석연료 생산을 극대화하겠다는 구상을 밝히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에너지 정책과 미국의 자동차 산업에 대해 설명한 영상을 통해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 정책은 미국 자동차 제조 관련 일자리를 약 11만7000개 없앨 것이며 미시간·인디애나·오하이오 근로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며 집권 시 바이든 대통령이 추진해온 자동차 연비 규제 및 전기차 의무판매 비중을 없애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핵심 정책인 IRA를 폐지할 뜻을 분명히 했다. 트럼프의 재집권이 자동차와 배터리를 캐즘의 늪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결정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캐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위기와 기회의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캐즘 현상은 주로 정보통신·IT 등 첨단 산업에서 발생한다. 해당 산업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제품과 서비스를 많이 선보이는데 소비자가 이에 적응하고 가치를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 기간을 잘 이겨내면 오히려 대박을 낼 수 있다. MP3 플레이어는 캐즘을 이겨낸 대표적인 제품으로 언급된다. 1990년대 말 MP3 플레이어가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와 CD 플레이어에 밀려 위기를 맞기도 했다. MP3 플레이어는 그러나 인터넷과 조화를 이루면서 음원 다운로드 플랫폼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해냈다.

캐즘은 소비자 집단이 단절돼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신제품을 빨리 받아들이는 '얼리 어답터'들은 아주 소수다. 어느 정도 신제품에 관심이 있지만 실용성에 더 무게를 두거나, 신제품이 시장 표준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린 후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다수다. 주류 소비자들은 급격한 변화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전기차도 마찬가지다. 성능이 충분히 검증되고 동네 곳곳에 충전소가 들어선 다음에 사겠다고 하거나, 다수가 전기차로 바꿔 내연기관 차 운행이 불편해졌을 때 구입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기차와 배터리도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고 있다. 기술 혁신으로 성능을 높이고 생산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춘다면 내연차를 완전히 몰아내고 본격적인 전기차 시대를 활짝 열 수 있을 것이다. 캐즘의 덫을 돌파하는 관건은 역시 소비자의 접근을 용이하게 만드는 기술의 혁신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