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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대통령의 날 vs 이승만 건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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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대통령의 날 vs 이승만 건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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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전경
미국에는 대통령의 날이라는 공휴일이 있다. 해마다 2월 3번째 월요일을 대통령의 날로 정해 놓고 미국 전역이 공휴일로 지낸다. 뉴욕증시도 휴장한다. 국채금리 달러환율 국제유가( WTI ) 거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산으로 처리되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등 가상 암호화폐는 365일 24시간 거래되는 관계로 공휴일과는 무관하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 선언을 했다. 독립전쟁을 거쳐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 받기에 이른다. 1787년에 미국 합중국 헌법을 반포했다. 정부가 출범한 것은 1789년이다. 초대 대통령은 그 유명한 조지 워싱턴이었다. 미국은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스파냐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해 나갔다.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서부를 개척해 나가기도 했다. 노예제 문제 등으로 갈등이 깊어지면서 1861년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을 치르게 된다. 남북 간의 내전은 1865년에 북부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것은 북부의 생산력, 특히 공업력이 남부의 농업에 대하여 거둔 승리이다.
미국은 정부수립 90주년이던 1879년 초대 대통령의 건국 업적을 기려 조지 워싱턴 생일인 2월 22일을 대통령의 날 연방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러다가 1968년에 와서 대통령의 날을 2월 22일에서 2월 3번째 월요일로 조정을 했다. 기존의 날짜 지정 방식은 토요일이나 일요일과 자주 겹쳐 공휴일 효과가 반감되곤 했다. 1968년부터는 요일 지정제로 바꿔 토, 일요일과의 중복을 막은 것이다.

일부 주에서는 대통령 기념일에 추모 대상에 조지 워싱턴뿐 아니라 에이브러햄 링컨도 포함시킨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령의 생일은 2월 12일이다. 대통령의 날을 워싱턴의 생일인 2월 22일에서 2월 3번째 월요일로 바꾸면서 생일이 비슷한 링컨 대통령도 포함시키는 주가 생겨난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두 대통령을 합쳐 하나의 대통령의 날로 승화시킨 주가 많다. 다만 노예해방에 반대했던 남부의 일부 주에서는 링컨을 대통령의 날에 포함시키는 데 반대하고 있다. 링컨 대통령에 반대하는 주에서는 대통령의 날 이라는 표현 대신 조지 워싱턴 생일로 부르고 있다. 노예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강등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미국 국무부는 대통령의 날에 대해 조지 워싱턴과 링컨 두 대통령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밝히고 있다. 국무부는 조지 워싱턴에 대해 " 미국의 정치가로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헌법제정회의에서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 권한을 강화한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으로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과 헌법의 실현 등에 힘써 신생 미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지 워싱턴은 흔히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버지니아주 출생.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토지측량관이 되었다. 1752년 이복형이 죽자 광대한 마운트버넌의 토지와 버지니아 민병대(民兵隊)의 부대장직을 이어받고 1754년 7년전쟁, 즉 프렌치인디언전쟁에 참가하였다.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의 땅이 프랑스인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을 반대한 때문이었다. 그 후 본국과 식민지와의 항쟁이 일어나자 서부의 토지문제를 놓고 영국의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다.

버지니아의회 의원으로서 1765년 P.헨리를 지지, 인지조례의 반대를 관철시켰으며, 1769년 타운센드법을 반대하다 의회가 해산당하게 되자 영국상품 불매동맹을 결성했다. 1774년 제1회 대륙회의에,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의 대표로 참석했다. 회의에서 무력항쟁이 결의되자 그는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피로에 지친 식민지군을 격려, 역경을 잘 극복해나갔다. 1781년 10월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 요크타운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783년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군대를 해산시킨 뒤 연합회의에 군의 통수권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연합회의가 무력하여 미국의 독립이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자 1787년 헌법제정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의장직을 맡아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 헌법에 의하여 1789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그는 특히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에 노력하고, 헌법을 실제 정치에 반영시키는 한편, 여러 나라와의 국교를 조정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정견을 달리한 A.해밀턴과 T.제퍼슨을 각각 재무장관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여 국내 재정정책의 수립과 외교정책의 정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해밀턴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수립하였다.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민주주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하였다. 신생(新生) 미국의 기반을 굳게 다진 데 대한 그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재임 1861~1865)이다. 북 전쟁에서 북군을 지도하여 점진적인 노예 해방을 이루었다.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나 이듬해 암살당하였다. 게티즈버그에서 한 연설 중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다. 미국 켄터키주(州) 호젠빌 출신이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으나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했다.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 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전에서 행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인민 주권론을 비판하였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과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 쪽에서 노예제 유지의 브리켄리지와 인민주권의 더글러스의 두 명의 후보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과 함께 남부 제주(諸州)는 잇달아 합중국을 이탈하여 남부연합국을 결성하였다. 링컨은 이미 노예제를 가지고 있는 남부 제주의 노예를 즉시 무조건 해방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앞으로 만들어질 준주(準州)나 주(州)는 자유주의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나, 4월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 그는 의회에 대하여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요청하고, 독재적 권한을 행사하여 인신보호령장의 정지, 언론집회의 자유의 제한을 강행, 반대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여러 세력을 조정하여, 북부의 강경론자들을 누르면서 노예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하였으나, 1862년 9월 남군이 수세로 몰린 때를 노려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외국의 남부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써, 북부와 해외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전황을 일거에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에서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다. 전쟁 중인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U.S.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1865년 4월 9일 남군사령관 R.E.리가 애포매턱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종막을 고하였다. 전쟁이 종막에 가까워짐에 따라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조기 연방 복귀를 바랐으나 그해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관람 중 남부인 배우 J.부스에게 피격, 그 이튿날 아침 사망하였다.

대통령의 날은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 받는 두 대통령의 생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2월 12일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일이며 2월 22일은 조지 워싱턴의 생일이다. 두 대통령은 각자의 방식대로 미국의 기반과 발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조지 워싱턴은 영국 왕실로부터 미국의 독립을 쟁취한 후 미국을 세웠다. 미국 혁명 이후 6년간 미국은 식민지들을 하나로 결속하면서도 개별 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연방 정부를 만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워싱턴은 두 번의 4년 임기 후에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에서 떠났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국가가 분열 위기에 빠졌을 때 대통령을 지냈다. 남북전쟁 이후 링컨은 연방정부와 주 정부 사이의 평화로운 권력 분배의 해법을 마련했다. 오늘날 ‘대통령의 날’은 미국의 최고위직에 있었던 모든 사람을 기리는 날로 승화되고 있다. 대통령이 제대로 존경 받지 못하는 또 건국전쟁에서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