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1776년 이 곳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1787년에는 여기서 미국 연방 헌법을 제정했다. 필라델피아는 1790년부터 1800년까지 미국의 수도였다. 경영학을 최초로 만든 펜실바이나대학(유펜)도 바로 이곳 필라델피아에 있다. 유펜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졸업한 모교이기도 하다.
해밀턴은 미국 독립전쟁 중 조지 워싱턴의 부관으로 활약하였다. 독립 후 아나폴리스회의와 헌법제정회의에서 뉴욕 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연방헌법 비준 성립을 위해 '연방주의자 The Federalist'를 발표하였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면서 미국 경제의 발판을 닦았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바로 이 해밀턴에 의해 출범했다. 미국 합중국 제 1은행은 연방조폐국을 관할하면서 달러 발행및 유통 질서를 잡고 연방 재정의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해밀턴은 국가의 신용을 개선하고 새로 제정된 헌법으로 미국 정부의 금융 사업 관리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립은행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1817년 다시 부활했다. 미-영 전쟁으로 국가 채무가 크게 늘어났다. 그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만연했다. 민간 은행의 마구잡이 지폐 발행으로 신용질서가 무너졌다. 이 위기 수습을 위해 중앙은행이 다시 필요해졌던 것이다. 미국 의회는 1817년 1월 제2 미국 합중국 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을 설립했다. 제2 미국 합중국 은행의 본부는 제1 은행과 마찬가지로 필라델피아의 카펜터스 홀에 있었다. 이 은행은 정부가 대주주로 20%의 지분을 가지면서 4,000명의 개인투자가들이 80%를 가지는 주식회사 형태였다.
미 합중국 제2 은행은 연방 정부의 여러 가지 업무를 위한 편리한 기관으로 만들어졌다. 이 은행은 제임스 매디슨과 앨버트 갤러틴이 1814년 끝난 미영 전쟁의 뒤처리로 국가 재정이 어려움을 겪을 때 만들어졌다. 미영 전쟁의 결과 미국은 큰 부채를 안고 있었고, 미합중국 제1 은행은 1811년에 폐쇄되어 있었다. 제2 미국 합중국 은행도 오래 가지 못했다. 반연방주의자였던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연장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종말을 고했다. 1836년 인가 기간이 만료되자 필라델피아의 보통 은행으로 바뀌었다. 이 은행은 5년 후 파산했다.
이후 미국은 민간은행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각자 은행권을 발행하는 춘추 전국시대를 맞게 된다. 이 시기 미국은 수시로 금융 대란을 겪었다. 큰 그림을 그리면서 국가경제를 관리하는 중앙은행이 없는 상태에서 민간 은행들간의 무한 경쟁은 혼란 그 자체 였다.
1907년에 결국 일이 터졌다. 은행 신용붕괴로 경제공황이 온 것이다. 뉴욕 증시는 50 % 폭락했다. 뱅크런이 발생하면서 수많은 은행과 증권사들이 파산했다. 뱅크런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금융 기업들의 자산이 매우 크게 늘어났는데도 관리가 부실하고 제대로 된 금융 규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느슨한 금융기업 규제, 특히 트러스트(trust)라는 신탁회사에 대한 규제가 너무 없었던 나머지 최소 지금준비금이 매우 낮은 상태에서 보유한 많은 금융자산들을 전부 다 주식에 배분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느슨한 규제 때문에 뉴욕의 금융 기업들에 유동성이 부족했다. 신탁회사들의 금융시스템에 대한 낙후된 리스크 관리 때문에 뱅크런의 영향이 증폭되었다.
1907년 그 당시에는 2만 1천개의 은행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금융시스템의 생산성이 낮고 매우 낙후되었기 때문에 공동 보조를 맞추기 위한 협의기구나 유동성 위기 대응을 위한 공동 지급준비금 등의 위기 대응책 같은 것이 없었다. 중앙은행도 없었기에 은행들에게 갑자기 많은 예금 인출, 즉 뱅크런이 일어난다면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1907년 공황의 주범이었던 신탁회사는 금융시스템에서 가장 약한 고리였는데, 이 신탁회사들은 변변찮은 지급준비금으로 다양한 머니 게임을 벌였고 심지어 벤처 투자에도 많은 비율의 금융자산을 배분할 수 있었다. 신탁회사 관련 법적 규제가 아예 없었다. 이런 약한 금융시스템 상황에서 뱅크런이 일어나면서 경제공황이 야기된 것이다.
이 위기를 해결한 사람은 JP모건이다. 당대 최고의 금융 자본가였던 JP 모건(존 피어폰트 모건)은 위기가 심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JP 모건은 신탁회사 회장들을 전부 불러모아 신디케이트 자본을 모아서 유동성을 확보하고 금융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금융자산을 내놓았다. 뉴욕의 은행, 신탁회사를 설득해 구제금융 신디케이트를 만들었고 자금을 지원하면 살 수 있는 기업 즉, 금융자산의 질이 좋으나 당장의 유동성만 없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금융자산의 질이 좋지 않은 기업이어서 자금을 지원해도 파산할 수밖에 없는 기업은 놔두는 식으로 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파산의 연쇄고리를 간신히 끊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3번째 중앙은행 설립운동이 일었다. 위기 이듬해 존 록펠러 2세의 장인인 넬슨 W. 앨드리치 상원 의원은 '앨드리치 브리랜드 법'을 제안했다.그 법에 따라 1907년 공황에 대한 조사와 다가올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언하기 위해 국가 금융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이 후 ‘연방준비제도’ 설립의 첫 걸음이 되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1913년 연방준비법이 통과 됐다.이것이 오늘날 미국 연방준비제도 즉 연준의 시작이다.
지금 세계는 연준 FOMC의 금리인하 결정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인플레와 경기침체의 공포 속에 제롬 파월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지 미국 연준이 또 한 번 역사의 모멘텀을 지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주필/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