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광주 등 호남지방에서는 87개 도로와 38개 건물이 침수되었으며, 403개 학교가 폐쇄되었다. 경남 함안과 창녕, 밀양, 의령 등지에서도 주택 침수와 산사태 피해가 속출했고, 낙동강 지류가 범람해 농경지와 공장이 잠기며 산업활동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일부 반도체 및 공업단지의 조업도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산업은 전력, 통신, 데이터, 수송 등 복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시스템 위에 구축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 에너지가 있다. 송전망, 변전소, 데이터센터가 정지되면 의료, 금융, 제조, 행정 등 사회 기능 전반이 동시다발적으로 멈추게 된다. 갈수록 심화되는 기후 재난은 에너지 시스템이라는 기반부터 무너뜨리고, 이는 사회 전체를 흔드는 연쇄 붕괴로 이어진다.
실제로 2025년 2월, 서산 대산석유화학단지의 정전으로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의 공장이 멈췄고, 재가동까지 며칠이 소요되며 수백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단 몇 시간의 정전이 국가 전략 산업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에너지 시스템의 복원력이 곧 산업의 복원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국은 전력망이 국경을 넘나들지 못하는 고립된 구조다. 전력을 모두 국내에서 조달해야 하며, 재난 발생 시 외부로부터의 공급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반도체·석유화학·철강 등 고품질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이 밀집되어 있어, 단 1초의 정전도 수십억 원의 손실로 직결된다. 기존의 에너지 안보가 '충분한 공급'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재난 속에서도 작동하는 시스템', 즉 회복력을 중심으로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전략을 제안한다.
첫째, 지역 NESI(National Energy Security Index ,국가에너지안보지수)의 도입이 필요하다. 재난은 지역에서 발생하며, 그 회복력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지역별 복원력 수준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수립하려면, 중앙 단위의 NESI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 NESI는 물리적 인프라의 재난 취약성, 에너지 공급 다양성, 비상 대응 역량, 사회적 취약성 등 항목을 포함해, 지자체 차원의 예방 및 복구 계획 수립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이는 지역 맞춤형 회복력 전략을 세우기 위한 기반이 된다.
둘째, 분산형 비상전력 시스템을 확대해야 한다. 병원, 반도체공장, 제철소, 데이터센터 등은 정전 시 생명과 산업 모두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 디젤 발전기 수준의 대응은 한계가 있으며, 수소 연료전지, ESS, 마이크로그리드 등으로 최소 48시간 이상의 자립 전력 운전이 가능하도록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셋째, 디지털 기반 조기 경보 및 예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기후위기의 양상이 나날이 거칠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방식으로는 사전 대응이 불가능하다. AI 기반 예측, 실시간 센서 감시, 자동 차단·복구 시스템, 디지털 트윈 기반 시뮬레이션 기술 등을 통해 전력망은 감시·예측·대응·복구 기능을 갖춘 스마트 인프라로 진화해야 한다.
에너지의 안전은 그저 공급량이 충분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공급된 에너지가 재난 속에서도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복구되고 작동 가능한 시스템,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에너지 안보의 실체다. 2025년의 기록적 폭우는 우리가 설계한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낸 경고장이었다. 회복력을 갖춘 에너지 시스템, 그리고 재난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순간부터 설계해야 할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