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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집은 사는 곳이지,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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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집은 사는 곳이지,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성필 산업2국장이미지 확대보기
최성필 산업2국장
“집은 사는 곳이지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이 말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간절한 소망이자 이루기 어려운 이상이 되어버렸다.

집이 ‘가장 확실한 재테크 수단’으로 둔갑하면서 집의 본질적인 가치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어디에 사느냐”보다 “얼마짜리 집에 사느냐”로 사회적 위치를 평가하기도 한다.
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빈곤은 세습되며 계층 이동 사다리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집의 위치가 계급이 되고, 평형이 소득의 크기가 된 것이다. 집은 이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자산 증식의 수단이자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부동산 시장은 이제 단순한 자산 시장을 넘어 국민 정서와 정책 논쟁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집을 사려는 사람과 집을 지으려는 사람 그리고 집을 가진 사람의 이해가 얽히면서 시장은 늘 불안정하다.

역대로 정부는 부동산 안정을 위한 대책을 수십 차례 내놓았지만 매번 가격은 더 높아졌고, ‘공급 부족’과 ‘투기 과열’이 맞붙는 소모적 논쟁 속에서 정작 주거의 본질은 흐려졌다.
집은 더 이상 쉼의 공간이 아니라 불안과 욕망이 얽힌 투자 상품이 돼버린 것이다.

노동보다 자산이 더 빠르게 불어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노력보다 ‘집 한 채’를 꿈꿨다.

정부가 대출을 조이고 세금을 늘려도 기대심리는 꺼지지 않았다. 규제는 시장을 눌렀지만 근본적 인식의 전환은 없었다.

집은 여전히 ‘투자의 대상’이지 ‘삶의 공간’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집은 언제부턴가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집이 경제적 수단으로만 인식되면 사회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의 늪으로 빠진다. 자산의 격차가 곧 삶의 격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 정책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정부의 정책은 늘 시간에 쫓기며 어떤 때는 ‘부동산 광풍’을 잡겠다며 규제를 쏟아냈고, 다른 때는 거래를 살린다며 대출 문턱을 낮췄다. 그러나 방향은 언제나 ‘가격’에만 맞춰졌다.

정부가 집값을 조정하려 했지만 정작 사람의 삶을 지킬 철학은 빠져 있었다. ‘주거는 권리’라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앞으로는 시장을 억누르는 단기 규제보다 거주 중심의 장기적 체계가 필요하다. 실수요자 보호 중심의 금융정책, 안정적인 공공임대 확대, 재건축의 투명한 평가 기준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정책은 ‘투자 심리’를 자극하기보다 ‘거주의 질’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공공임대의 확대, 청년과 신혼부부의 장기 거주 보장, 도심 내 생활권 중심의 재개발 방식 전환 등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소유 중심’의 설계에서 ‘이용 중심’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공유주택, 장기임대, 지역 커뮤니티 기반의 주거 실험들이 우리 사회에 더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주거 안정이 곧 복지의 기초이자 사회적 신뢰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을 갖고 주거정책은 이제 ‘사는 곳’을 되찾는 일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성장에 치우친 정책 속에서 집은 서서히 본래의 의미를 잃기 시작했고, 너도나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고 전 생애에 걸친 노동의 대가를 집에 묶어두는 이상한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집은 그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피어나는 따뜻한 터전이어야 한다. 돈벌이의 수단이 아닌 가족과 개인의 행복을 위한 안식처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사는 곳'으로서 집을 가질 수 있다.

이제라도 정부와 사회 모두가 '사는 것'이 되어버린 집의 가치를 다시 '사는 곳'으로 되돌리기 위한 지혜로운 사회적 논의와 과감한 정책적 전환을 위해 고민해야 할 때다.

내 집이 ‘돈’보다 ‘삶’을 담는 공간이라는 당연한 가치가 회복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주거 문제도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성필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ava01@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