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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돈 없는데 창고만 지키나"… 27년 '종이 방패'에 뚫린 에너지 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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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돈 없는데 창고만 지키나"… 27년 '종이 방패'에 뚫린 에너지 안보

90만 배럴 반출 뒤 산업부·석유공사 '네 탓' 공방
우선구매권 제도, 계약 구조에 막혀 실전 무력화
2023년 3월 한국석유공사 여수비축기지에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국영석유사(ADNOC)의 원유 200만 배럴이 입고되는 모습. 사진=석유공사이미지 확대보기
2023년 3월 한국석유공사 여수비축기지에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국영석유사(ADNOC)의 원유 200만 배럴이 입고되는 모습. 사진=석유공사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한국이 꺼내 든 비장의 카드는 작동하지 않았다. 국내 비축기지에 산유국이 맡겨놓은 원유를 우선 사들일 수 있는 권리, 즉 '우선구매권'이었다. 1999년부터 27년간 국제공동비축 제도의 핵심 안전장치로 설계됐지만, 정작 그 권리를 행사할 예산도, 장관의 공식 지시도 없었다. 원유 90만 배럴은 동남아시아로 팔려나갔다.

한국석유공사 노동조합은 지난달 25일 성명서를 내고 산업통상자원부의 긴급 감사를 "탁상행정의 책임을 산하기관에 전가하는 처사"라고 반박했다.

200만 배럴 입고, 90만 배럴 증발...산업부, 석유공사 감사 착수


해외 기업 A사가 지난 3월 5~8일 울산 비축기지에 원유 200만 배럴을 입고했다. 국내 정유사가 A사와 구매 계약을 한 물량이었다. 원유가 입고되기 전인 2월 말 이란 전쟁이 터지면서 국제유가가 급등했고, A사는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해외 구매자에게 전량을 넘기는 계약을 추진했다.

석유공사는 지난달 9일 우선구매권 행사를 A사에 통보했지만 이미 늦었다. A사는 110만 배럴에 대해서만 국내 공급권을 내줬고, 90만 배럴은 해외 반출을 강행했다. 90만 배럴은 국내 하루 소비량(약 250~280만 배럴)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산업부는 지난달 20일 "우선구매권 즉시 행사 미비"를 이유로 석유공사 감사에 착수했다.

"예산도 지시도 없었다"…'미판매 물량'에만 한정된 우선구매권


노조가 지목한 핵심은 예산과 지휘 공백이다. 해외 기업 소유의 국제공동비축유를 구매하려면 수천억 원 규모의 예산이 필요하고, 석유사업법상 비축 계획·시책의 수립·시행은 산업부 장관의 책무다.

노조는 "장관의 공식 지시도, 구매 예산 배정도 없이 공사에 독자 결정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했다.

계약 구조 자체도 허점을 안고 있었다. 업계에 따르면 석유공사와 해외 기업 간 계약에는 '미판매 물량(unsold product)'에만 우선구매권이 적용된다는 조항이 있어, 이미 제3자와 계약이 완료된 물량은 우선구매권으로도 손댈 수 없는 구조다. 우선구매권 발동 조건도 걸프 지역 원유 수출 전면 금지, 한반도 전쟁 선포, 전략비축유 전월 대비 50% 이상 감소 등 극단적 상황에서만 발동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번 감사 대상에는 석유공사 관계자뿐 아니라 산업부 관계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국제공동비축 사업을 개시한 이래 비축 계획·시책의 수립·시행 책임을 진 주무부처가 사각지대를 27년간 방치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1월엔 "유가 하락", 3월엔 "대응 미비"… 갈팡질팡 산업부


노조는 산업부의 정책 번복도 비판했다. 올해 1월 업무보고에서 산업부는 "유가가 배럴당 30달러까지 하락할 수 있다"며 비축 전략 수정을 공사에 요구했고, 두 달 만에 상황이 역전되자 대응 미비를 이유로 감사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노조는 △산업부의 정책 오판 책임 인정 및 정상화 방안 마련 △지시는 산업부, 책임은 공사가 지는 구조 개선 △표적 감사 철회를 요구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상급단체와 연대해 끝까지 항거하겠다"고 경고했다. 산업부는 "감사 결과 시스템 문제가 확인되면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정부·민간 합산 비축유는 약 1억9000만 배럴로, 실질 국내 소비 기준 68~76일 분에 그친다.


전수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2040sysm@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