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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프랑스·일본 정치 불안, 세계 국채 시장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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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프랑스·일본 정치 불안, 세계 국채 시장 흔들다

투자자, 재정 건전화 요구…정치권은 긴축 '독배'에 발목
'정치가 금리 결정'…실질 수익률 급등에 부채 지속 가능성 경고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세계 금융시장의 나침반이 중앙은행에서 정치로 넘어가고 있다. 각국 정부의 재정 불안과 정치적 갈등이 심화하면서 국채 투자자들이 전례 없던 '정치적 웃돈'을 요구하며 부채 지속 가능성에 대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1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재정 건전화와 정치적 생존이라는 상충하는 과제 앞에 선 각국 정부의 고뇌가 깊어지는 모양새다.

유럽의 심장부 프랑스가 먼저 불씨를 당겼다.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총리가 예산안 교착 상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가 하룻밤 만에 다시 임명되는 촌극이 벌어지자, 프랑스 채권 시장의 위험 지표는 한 해 최고치로 치솟았다. 시장의 신뢰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뚜렷하게 보여준 사례다.

태평양 건너 일본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강경파인 다카이치 사나에가 집권당 대표로 깜짝 등장하며 재정 지출 확대 우려가 번지자 일본 장기 국채 가격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 여파로 일본의 20년물과 30년물 국채 실질 수익률은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연립정부가 무너지면서 일본은 수십 년 만의 가장 큰 정치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커지는 '정치 웃돈'…고개 드는 부채 위기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투자자들은 재정 건전화를 강하게 요구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 정책은 선거에서 '독배'와 같아 정치인들이 섣불리 선택하기 어렵다. 오히려 투자자들의 재정 긴축 요구와 정치 긴장이 채권 수익률 상승과 국채 매도세를 일으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미중 무역 갈등 같은 지정학적 긴장까지 더해져 불확실성은 더욱 커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상품에 대한 '대규모 관세 인상'을 위협한 것은 세계 경제 성장 전망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운다.

악사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 인스티튜트의 크리스 이고 회장은 "지정학적 위험과 정치 위험이 커졌고,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진다"며 "앞으로 10년간 정치 위험은 높은 수준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은 이미 반응하고 있다. 물가 상승을 고려한 실질 수익률은 몇 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코메르츠방크의 크리스토프 리거 금리·신용 리서치 책임자는 이를 두고 "정치 위험 증가와 함께 각국 정부가 더 많은 빚을 내야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그는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 최고 신용등급 국가들의 장기 실질 수익률이 잠재 성장률을 눈에 띄게 웃돈다는 점을 지적하며 "투자자들은 스스로 악화하는 부정적인 흐름을 경계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조정이 이뤄지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기까지 시장의 고통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영국은 주요 선진국 가운데 국채 빌리는 비용이 가장 높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오는 11월 노동당 정부는 350억 파운드(약 66조 원)에 이르는 재정 부족분을 메워야 하는 예산안을 발표해야 한다. 지난 선거에서 내건 감세 약속을 깨지 않으면서 재정 건전성을 확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어떤 정책이 나오든 상당한 정치 비용이 따를 것이라는 점이 투자자들의 경계심을 키우고 있다. 악사의 이고 회장은 "투자자들은 프랑스와 영국 정부가 필요한 구조 개혁, 지출 삭감, 증세를 해낼 역량이 부족하다고 본다. 정치가 너무 나뉘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유럽·일본 '살얼음판' 속 미국은 '나 홀로 안전지대'


이런 혼란 속에서 미국 국채는 오히려 '안전 자산' 지위를 굳히고 있다. 정치 불확실성과 연방정부 폐쇄에도 투자자들은 여전히 미국 국채를 피난처로 삼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올 들어 내림세를 보이며 다른 선진국과 대조를 보였다. 다만 달러 가치는 최근 1년 만에 주간 상승률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복합 변동성을 보였다. DWS 아메리카의 조지 카트람본 채권 책임자는 "미국 국채를 피하는 분위기는 없다"며 "일본, 프랑스, 영국의 재정 문제를 생각하면 어디에 투자하겠는가? 미국은 여전히 예외 지위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시장 참가자가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씨티그룹의 제이미 설 전략가는 영국 국채 금리가 수십 년 만에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이미 재정 문제가 가격에 충분히 반영됐다는 신호라고 풀이했다. 그는 "레이첼 리브스 재무장관이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증세와 지출 삭감을 한다면 영국 국채에 좋은 소식이 될 것"이라며 영국 국채가 프랑스 국채보다 높은 수익률을 보이도록 투자하라고 추천했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은 따른다. 프랑스 채권 시장은 주 후반으로 가면서 조기 총선 가능성이 줄자 낙폭을 일부 만회했지만,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산안 통과를 위해 연금 개혁 후퇴 같은 정치 타협을 한다면 프랑스의 재정 사정은 더욱 나빠지고, 시장은 또다시 흔들릴 수 있다.

시장의 인내심이 언제 바닥을 드러낼지가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웬티포 에셋 매니지먼트의 펠리페 비야로엘 파트너는 "가장 큰 질문은 시장이 '이제 그만'이라고 결정하고 대중과 정치권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때가 언제 오느냐는 것"이라며 시장이 정치에 최후통첩을 보낼 날이 머지않았음을 내비쳤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