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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TSMC '구매 여제'의 굴욕?…엔비디아 '영업직' 이직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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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TSMC '구매 여제'의 굴욕?…엔비디아 '영업직' 이직 미스터리

'TSMC 최연소 부사장' 1년 만의 사임…'축소 이직' 뒤에 숨은 양사 고위층의 "최상의 합의
"글로벌 공급망 총괄이 '대만 영업'으로…젠슨 황, TSMC CoWoS 물량 확보 '승부수' 던졌나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2024년 TSMC 최연소 부사장으로 등극하며 '구매 여제'로 불렸던 바네사 리(Vanessa Lee) 전 부사장이 2025년 7월 돌연 사임한 지 4개월 만에 엔비디아에 합류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IT전문 매체 디지타임스가 18일(현지시각) 보도했다. 그의 새 직책은 엔비디아의 월드 와이드 필드 오퍼레이션(WWFO) 그룹 부사장 겸 대만 지역 영업 총괄이다.

TSMC의 글로벌 자재 관리 및 공급망을 총괄하던 핵심 인물이 경쟁사(이자 최대 고객사)의 '대만 지역 영업직'으로 이동한 것을 두고, 반도체 업계에서는 올 한 해 가장 충격적이고 미스터리한 인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권한 축소'로 보이는 이 이직을 두고 TSMC와 엔비디아 양사 고위층이 "최상의 합의(the best arrangement)"라고 언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전략적 계산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애플의 칼' 영입한 TSMC…파격 발탁과 내부 갈등설


바네사 리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번 이직의 무게감은 더욱 커진다. 그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애플의 조달 이사로 재직하며 TSMC를 상대로 한 파운드리 가격 및 물량 협상을 주도했던 '무서운 협상가'였다. 당시 그는 특유의 공격적인 조달 전략으로 TSMC를 거세게 압박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를 2022년 TSMC의 웨이저자(魏哲家) 회장이 직접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했다. 애플의 '칼' 역할을 하던 인물을 TSMC의 '방패'이자 글로벌 구매 총괄로 앉힌 것이다. 웨이 회장은 리 부사장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고, 그는 2024년 TSMC 역사상 최연소 부사장으로 고속 승진하며 웨이 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그의 공격적인 업무 스타일과 '외부자'라는 배경이 TSMC 내부의 견고한 파벌 및 기존 임원들과 적지 않은 마찰을 빚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1년 만에 '개인적 사유'를 들며 돌연 장기 휴가에 이어 사임계를 제출한 것은, 이러한 내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수순이었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영업직'은 위장막?… CoWoS 물량 확보가 '진짜 임무'


이번 이직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지점은 그의 직무 변경이다. 애플, 구글, TSMC에서 글로벌 공급망과 원자재 조달을 총괄했던 최고 전문가가 엔비디아의 '대만 지역 영업'을 맡는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명백한 '커리어 다운' 혹은 '직무 불일치'로 비친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이 '대만 영업 총괄'이라는 직함이 본질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엔비디아에 대만은 단순한 영업 시장이 아니다. 엔비디아의 AI 반도체(B100, B200 등) 생산에 필수적인 CoWoS(칩 온 웨이퍼 온 서브스트레이트) 패키징을 독점 공급하는 TSMC 본사가 위치한 '최핵심 전략 기지'다.

현재 엔비디아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은 TSMC의 CoWoS 생산 능력(Capacity) 부족이다. 젠슨 황 CEO가 수차례 TSMC에 증산을 요청했음에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 영업 총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현지 PC 제조사에 GPU를 파는 것이 아니라, TSMC와의 관계를 관리하고 더 많은 CoWoS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결국 엔비디아는 TSMC의 공급망 전략, 원가 구조, 자재 관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CoWoS 용량 배분 프로세스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바네사 리를 영입한 것이다. 이는 TSMC와의 향후 물량 및 가격 협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겠다는 젠슨 황 CEO의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TSMC 입장에서 보면, 내부 갈등을 빚던 임원을 내보내 조직을 안정시키는 '최상의 합의'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자사의 핵심 구매 전략과 내부 사정을 훤히 아는 인물을 최대 고객사이자 가장 까다로운 협상 대상자인 엔비디아에 넘겨주게 됐다. 이는 TSMC에 상당한 전략적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반면 엔비디아는 TSMC 내부의 '인물 리스크'를 자사의 '공급망 무기'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바네사 리의 이번 이직은 단순한 인물 이동을 넘어, AI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파운드리와 팹리스 간의 치열한 수 싸움이 물밑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