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카타르산 헬륨 의존도 65%…피치 "가장 취약한 나라" 경고
러시아, 중국 헬륨 시장 주도권 노려…장기화 땐 가격 50% 추가 상승 가능
러시아, 중국 헬륨 시장 주도권 노려…장기화 땐 가격 50% 추가 상승 가능
이미지 확대보기반도체 굴기의 숨겨진 아킬레스건이 드러났다. 이란 전쟁이 세 달째로 접어든 지금, 전 세계 칩 공장을 조용히 위협하는 것은 최첨단 장비도, 수출 규제도 아닌 '헬륨'이라는 이름의 희귀 기체다.
세계 공급량 3분의 1을 책임지던 카타르가 이란의 공습으로 생산을 멈추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품은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경고등 앞에 섰다.
미국 CNBC는 지난 27일(현지시각) 보도에서 카타르 헬륨 수출 차질로 글로벌 칩 산업이 원자재 수급 위기에 처했으며, 러시아가 이 공백을 전략적으로 파고들 태세라고 전했다.
한국, 왜 가장 위험한가
헬륨은 풍선을 띄우는 기체가 아니다.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정밀하게 냉각하는 소재로, 식각(에칭)·증착·포토리소그래피 등 핵심 공정에서 대체재가 없다.
조지타운대 안보·신흥기술 센터 분석가 제이컵 펠드고이즈(Jacob Feldgoise)는 "웨이퍼 뒷면에 헬륨을 불어넣어 열을 빠르고 균일하게 제거하는데, 이 기능을 대신할 원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피치 레이팅스(Fitch Ratings)는 최근 보고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본거지인 한국이 헬륨 수입의 약 65%를 카타르에서 조달하고 있어 공급 부족에 가장 취약한 나라 중 하나라고 경고했다.
국내 반도체 관련 학계에서는 "현재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헬륨을 대신해 웨이퍼를 냉각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고 밝혔다.
이란 전쟁은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최고지도자를 제거하는 합동 공습을 감행하면서 시작됐다. 이란은 이에 맞서 카타르 등 인근 국가에 드론과 미사일 공격으로 보복했다.
카타르 국영 에너지 기업 카타르에너지(QatarEnergy)는 지난달 2일 이란 무기 공격을 받은 라스 라판(Ras Laffan) 산업단지에서의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이 시설은 하루 최대 17t의 헬륨을 추출·액화하는 세계 최대 생산 거점이다.
시장조사기관 인덱스박스(IndexBox)의 알렉산드르 로마넨코(Aleksandr Romanenko) 대표는 현재 월 520만㎥ 규모의 공급 부족이 발생하고 있으며, 현물 가격이 이미 70~100% 급등했다고 추산했다.
같은 기관 분석에 따르면, 분쟁이 30일간 이어질 경우 헬륨 현물 가격이 10~20% 추가 상승하고, 60~90일 지속 되면 장기 계약 없는 구매자들은 25~50%의 추가 가격 인상을 감내해야 할 수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단기 공급은 충분하며 기업들이 조달 경로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재고 현황이나 공급처 다변화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러시아의 계산된 침투
카타르의 공백을 노리는 가장 발 빠른 행위자는 러시아다. 투자은행 번스타인(Bernstein)은 지난달 13일 보고서에서 러시아가 이미 전쟁 이전부터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헬륨 생산을 꾸준히 늘려왔으며, 비제재 시장에 물량을 대거 풀어 가격 하락을 유발했다고 밝혔다.
컬럼비아대 국제공공정책대학원(CGEP)에 따르면 러시아의 대(對)중국 헬륨 수출은 2025년 전년 대비 60% 급증했다. 카타르는 지난해 중국 헬륨 수입량의 54%를 공급했는데, 이 물량이 막히면서 중국 시장에 거대한 공백이 생겼다.
S&P 글로벌 에너지 산업가스·비료 부문 조사 책임자 랄프 구블러(Ralf Gubler)는 "러시아 헬륨이 중국 같은 시장으로 유입되면 서방 칩 제조사들이 필요로 하는 품질 인증 물량이 간접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CGEP연구원 에리카 다운스(Erica Downs)도 "카타르 공급 차질이 이어진다면 러시아는 중국 헬륨 공급망에서 존재감을 더욱 키울 좋은 조건에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 가즈프롬(Gazprom)이 최근 가동을 시작한 아무르 2(Amur 2) 플랜트 생산량은 6억~7억 입방피트(MMcf) 규모로, 이를 포함한 대체 공급원을 모두 합해도 카타르 손실분의 절반 정도밖에 메우지 못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른블루스 헬륨 컨설팅(Kornbluth Helium Consulting)의 필 코른블루스(Phil Kornbluth) 대표는 "러시아 헬륨은 웨이퍼 공장 납품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다른 용도로 공급되면서 자격을 갖춘 물량의 여유를 늘리는 효과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현재 공급 부족 규모는 표면상 30%가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약 15% 수준에 가깝고, 단기에 전쟁이 종식되면 '공급 과잉 시대의 일시적 충격'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장기화 시나리오, 공급망 재편 불가피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애널리스트들은 "반도체·항공우주·의료 영상 등 헬륨 수요가 집중된 분야에서는 공급 안정성이 가격보다 우선시되며, 수급이 빡빡해질수록 공급 업체들이 가격을 끌어올리는 역사적 패턴이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휴전 후에도 생산 재개까지 최소 5주가 필요하다고 본다. 실제 피해 규모에 따라서는 라스 라판 시설 복구에 1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지정학 리스크가 공급망 지형을 바꾸는 속도는 예상보다 빠르다. 산디에이고대 공급망 관리학과 사이먼 크룸(Simon Croom) 교수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헬륨뿐 아니라 중동을 경유하는 수많은 공급망이 동시에 압박받는 복합 충격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위기가 반도체 업계에 단기 충격으로 그칠지, 아니면 공급망의 구조적 재편을 강제하는 전환점이 될지는 전쟁의 길이가 결정한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