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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 (3)] 1600년 역사 지닌 인도의 '연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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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 (3)] 1600년 역사 지닌 인도의 '연금술'

인도 야금술의 정수를 만나볼 수 있는 콜카다의 '하우라교'.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인도 야금술의 정수를 만나볼 수 있는 콜카다의 '하우라교'. 사진=로이터
“60년 이후에는 전세계 철의 매장량이 바닥 날 것이다” 1910년 스톡홀름 국제 지질학회에서 발표된 ‘철의 궁핍’에 대한 보고서 내용이다.

러시아의 자연과학자 ‘퍼스만’도 거들었다. “거리는 황폐화 될 것이다.” “철도, 기관차, 자동차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기찻길에 있는 자갈조차 필요 없을 것이며, 모두 물렁물렁한 점토질로 변해 버릴 것이다” “공장은 이 중요한 금속이 없어서 지탱을 못하고 없어질 것이다.”
공상 과학소설 같은 이 예측은 충격적이었으나 크게 어긋났다. ‘철은 아직도 못 다한 사랑’처럼 지금도 우리 곁에서 생생하게 잘 살고 있다.

녹슨 못과 맞바꾼 돼지 한 마리


오래전부터 철은 소중한 불씨였다. 영국의 탐험가(18세기) ‘제임스 쿡’은 폴리네시아제도 탐험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한 선원이 녹슨 못을 원주민에게 건네자, 돼지 한 마리를 주었다.” “오래된 칼 한 자루를 주자 선원들이 며칠 먹을 수 있는 양의 물고기와 맞바꾸기도 했다.”

철의 소중함은 솔로몬 왕 시대에도 거론된다. 예루살렘 솔로몬왕 궁전 건축이 끝나자 솔로몬은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을 축하연에 초대했다. 솔로몬은 벽돌공과 목수를 제쳐두고 대장장이에게 ‘당신이 가장 큰 공헌자’라고 치하했다.

이렇게 귀하게 다루었던 철이 산업적으로 이용된 시기는 19세기이다. 1778년 최초의 철교가 건설되고, 10년 후에는 철로 된 수도망이 처음으로 놓여졌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철선 발칸(Vulcan. 여객선. 艀船)호가 진수되고, 이 여객선에 오른 사람들은 환희를 맛보았다. 1868년 런던의 한 잡지에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기사화했다.

“1818년에 건조된 발칸호는 금 그리니코에서 수리중이다. 50년 전 이 배가 처음으로 진수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러 몰려들었다.” 철로 된 배가 물 위로 떠오르는 경이적인 장면을 보기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는 기사는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발칸호가 성공적인 운항을 시작하고 4년이 흐른 1822년, 영국에서는 증기선으로 만든 최초의 증기철선(길이 36.6m, 폭 5.18m, 30마력) 아론 만비(Aaron Manby)호가 런던과 파리 사이를 항해할 정도로 철강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진행한다.

좀 더 선박에 철강재가 사용된 근거를 알아보면 철의 사용처는 세상을 두배로 변화시킨다. 19세기 말에 철선은 계속 증가하고 배의 크기와 성능도 향상되었다. 대서양을 횡단한 길이 97m, 폭 15m, 여객정원 4,000명, 최대 속력 15노트의 그레이트 이스턴(Great Eastern)호가 출현한다. 1858년 베서머에 의해 제강법이 발명되면서 철보다 더욱 우수한 강철이 널리 공급된다. 1862년에 325톤급 밴쉬(Banshee)호가 건조되고, 큰 규모의 상선이 건조된 것은1879년 1,777톤급 로토마하나호가 시초이다. 철강 전방산업인 조선 산업은 지금 쾌속 항진중이다.

조선 산업과 더불어 철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은 철도산업이다. 최초의 철도는 1825년 영국에서 주문되었다. 그리고 영국이 지배했던 인도는 영국 통치 이후부터 전설적인 철교를 가설한다. 그중 지금도 많은 인도인에게 사랑을 받으며, 관광객들의 카메라 셔터가 자동으로 눌리는 지역은 인도의 ‘하우라교’이다.

‘하우라교’가 소재한 ‘콜카다’는 250년 동안 영국 자치령 속에 있었기 때문에 순전한 영국 토목기술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란 짐작을 하지만 철교건설 과정을 보면 의외로 인도의 철강기술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과 인도인들 스스로 만든 강철에 대한 자존심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순도 100% 철로 만든 기둥


‘하우라교’를 말하기 이전에 알아둬야 할 것은 인도의 수준 높은 야금술이다. 야금술의 백미는 부식방지 기술이며, 부식은 철의 천적이다. 이 부식을 방지하는 연금술은 고대 인도가 단연코 으뜸이었다.

철의 부식에 대한 심각성은 다음과 같다. 철은 산소와 반응하여 산화철을 생성한다. 산화철은 물과 반응하여 수화산화철을 생성한다. 수화산화철은 녹색이나 갈색의 부식물질로 변하게 된 것이 바로 녹이다. 녹은 철의 표면을 침식시키고, 철의 강도와 내구성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철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녹을 방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녹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와츠파’라고 불리는 강철 제조법이다. 와츠파는 인도의 남부 지역에서 발견된 강철로, 순도가 100%에 가까운 철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와츠파는 1,600년 전부터 만들어져서 중세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와츠파는 다른 강철보다 훨씬 강하고 부식에 강했다. 와츠파는 인도에서만 만들어지는 비밀의 연금술로 여겨져서, 유럽인들은 이것을 ‘인도의 강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와츠파 제조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동기를 사용하여 청동 용광로를 만든다. 둘째, 용광로 안에 숯과 함께 고품질의 철광석을 넣는다. 셋째, 용광로를 가열하여 철광석과 숯이 반응하게 한다. 넷째, 용광로에서 나온 액체 상태의 철을 금형에 부어서 모양을 만든다. 다섯째, 금형에서 꺼낸 철판을 단조하여 강도를 높인다.

와츠파 제조법의 핵심은 숯과 철광석의 비율과 가열 시간을 정확히 조절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숯에서 나오는 탄소가 철판에 적절히 침투하면서 강철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단조 과정에서 탄소가 일부 제거되면서 순도가 높아진다. 와츠파는 탄소 함량이 0.1% 이하로 매우 낮아서 부식에 강하고, 탄소가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어서 강도가 높았다. 와츠파는 인도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 과학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와츠파는 인도에서만 만들어지는 강철이었지만, 그 품질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와츠파는 중동과 유럽으로 수출되어서 칼, 검, 창 등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와츠파로 만든 검은 날카롭고 단단해서 ‘빛나는 검’이라고 불렸다. 와츠파로 만든 검은 유럽의 기사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유럽에서는 와츠파를 ‘데미아스크 강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와츠파는 무기뿐만 아니라 건축에도 사용되었다. 인도의 델리에 있는 ‘쿠탑 미나르’라는 탑은 1193년에 건설되었는데, 이 탑은 와츠파로 만든 기둥이 지탱하고 있다. 이 기둥은 1,600년 동안 녹이 슬지 않았고, 지금도 탑을 세워주고 있다. 이 기둥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강철 구조물로 알려져 있다.

와츠파 제조법은 인도의 고대 야금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와츠파는 천연 자원인 철광석과 숯을 이용하여 순도가 높고 강하며 부식에 강한 강철을 만들어냈다. 와츠파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도인들의 지혜와 창의력을 보여준다. 와츠파는 1,600년 전부터 만들어져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인도의 ‘연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산 철강재를 써라


지금 인도를 대표하는 철강기업은 타타스틸이다. 타타스틸 뿐만 아니라 세계 철강 산업의 최고봉에 서있는 철강왕 ‘미탈’(다국적 기업 미탈스틸)회장도 인도사람이다. 타타스틸의 모기업 타타그룹은 1868년 ‘잠셋지 나사르완지 타타’(Jamsetji Nasarwanji Tata)에 의해 세워진 기업 집단이다. 1901년 타타그룹은 인도 최초로 대규모 제철소를 지었고, 1907년 타타철강회사로 통합된 뒤 타타스틸로 이름을 바꿨다.

2006년 타타스틸은 생산 능력 기준으로 자신보다 4배나 규모가 큰 코러스를 인수했다. 이 기업은 막대한 자본을 무기로 그린필드 방식이 아닌 인수 합병 방식으로 기업의 몸집을 불려온 기업이다. 타타스틸은 ‘약속을 지키는 기업’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내세우고 있다. 타타스틸의 철강재로 만든 대표적인 교량이 바로 ‘하우라교’이다. 하루 교통량이 약 10만 대, 통행자가 약 15만 명에 이르는 콜카다의 상징, ‘하우라교’는 후글리강에 놓인 4개의 다리 가운데 하나이다. 1937년에 착공하여 1943년 2월에 개통되었지만 이 교량이 건설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34년부터 2년 동안 진행된 ‘하우라교량 건설 국제 입찰’은 시작부터 전제조항이 달려 있었다. 영국 ‘클리브랜드 교량 엔지어어링社’Cleveland Bridge & Engineering Co.Ltd)가 공개 입찰을 통해 교량 건설을 맡게 되었지만 인도 정부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최대한 인도산 철재를 사용한다.” “철골의 가공도 인도 기업이 콜카다에서 실시한다.”

이 조항은 낙찰 기업에 그대로 적용됐다. ‘하우라교’에 사용된 철제 2만6500톤 중 90%에 달하는 2만3500만 톤을 인도 타타스틸에서 조달했다. 철골의 가공도 인도 기업이 맡았다. 1934년이라면 타타스틸의 기업역사가 30여년이나 될 무렵이므로 퀄리티에서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영국 기업은 교량건설 기술만 제공하고 교량건설에 쓰이는 철강재는 인도 자국내에서 자급자족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하우라교’ 건설은 콜카다(Kolkata. 캘거타로도 불린다)에서 후글리 강을 사이에 둔 맞은 편 연안을 잇는 공사였다.

인도산 철강재로 만든 콜카다의 자랑 하우라교


‘하우라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콜카다의 환경을 보면 이내 알 수 있다. 콜카다는 인도 동부의 상업 도시이며, 인구가 1300만 명이나 되는 메가시티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도시인 동시에 인도인들의 종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성스러운 후글리강이 이곳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하우라교’는 강 주변과 철교를 오가는 엄청난 이동 인구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시가지 하류에 하천으로 만들어진 콜카다항은 이곳 시민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물류의 원활한 흐름은 이곳의 미래를 가늠하는 중대한 포지션이었다. 후글리 강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철골 트러스트 다리 ‘하우라교’를 바라보면 어마어마하게 웅장하다. 철강재 라이프 스타일의 진면목을 보는 느낌이 든다.

‘하우라교’가 만들어진 것은 ‘콜카다’에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철도역이 후글리강 맞은편 하우라 지구에 건설되면서부터이다. 후글리 강에 처음 설치된 다리는 목재 부교(1874년)였다. 부교는 불안했다. 이곳 강물은 조수 간만에 따라 수위와 흐름이 달라져 목재로 만든 부교로는 제몫을 하지 못했다. 강물의 수위가 내려가면 다리의 경사가 심해 짐수레가 다닐 수조차 없었다. 콜카다 사람들은 불평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철교가 건설되는 조짐은 서서히 나타났다. 1905년에 하우라 역사가 재건되고, 철도 이용자가 늘어나자 시민들은 부교를 대신할 철교의 건설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의 양쪽을 오갈 수 있는 튼튼한 ‘철다리’의 건설은 콜카다의 큰 숙제였다. 영국령 하에 있던 인도인들의 힘만으로 철도건설은 사실상 어려웠다.

오랜 숙원 끝에 ‘하우라교’는 페리와 터널, 부교, 철교를 포함해 여섯 가지 대체 안을 검토하기에 이른다. 철교는 철골 트러스트교 방식으로 건설하기로 결정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다리건설 계획은 물 건너갔다. 기존에 있던 목재 부교를 보수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콜카다의 기업인 무카디를 중심으로 한 기술 위원회, 통칭 무카디 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철교 건설은 다시 수면위로 올랐다.
하우라교 아래를 흐르는 강에서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하우라교 아래를 흐르는 강에서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런던 지하철 등을 건설한 영국 토목기술자 ‘바질’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 것이다. ‘바질’은 강 속에 교각이 없는 새로운 유형의 교량을 제안했다. 교각을 설치하지 않고 강 양쪽 연안을 한 번에 연결하는 교량을 만들려던 의도는 이곳의 생명 줄인 콜카다 항 때문이었다. 강 상류에서 쓸려온 토사가 후글리 강 곳곳에 퇴적되면 선박의 항로가 방해되는 이유이다. 콜카다항은 지금도 항로 유지를 위해 매년 대량의 토사를 퍼내야 간신히 기능을 유지하는 항구이다.

세계 랭킹 6위의 경간

결국 ‘하우라교’는 1929년 캔틸레버 트러스 방식의 교량구조를 채택한다. 캔틸레버 트러스교는 양쪽 연안에 고정시킨 외팔보를 뻗어 중앙의 현수 거더를 양쪽에서 지탱하는 다리이다. 설계는 영국 ‘파머 트리톤 사’(Rendel, Palmer and Tritton)에서 맡았다. 캔틸레버 교량은 철강재의 구성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곡선의 미를 자랑한다. 캔틸레버 교량 중 경간 길이가 가장 긴 순위는 캐나다 퀘백교-영국 포스교-일본 미나토대교(510m)-미국 코모도어배리 브리지교(501m)-미국 크레센트시티커넥션교(480m)-인도 하우라교(457.2m)이다.

1936년에 착공된 ‘하우라교’는 후글리강 양쪽 연안에 테니스 코트 네 개 정도 크기(55미터x25미터)의 지면을 굴착하는 토목공사를 해야 했다. 개당 2,000톤이나 되는 거더를 고정시키는 공사도 소화했다. 공사 중 발생한 세계 2차 대전도 잘 견디어냈다. 1943년 2월 완공될 때까지 ‘하우라교’는 약 20년 이상에 걸려 개통할 수 있었다.

‘하우라교’의 제원은 캔틸레버 암(팔) 길이 142.65미터, 중앙의 현수 거더 171.91미터, 도합 457.21미터이며, 폭은 30.81미터이다. 총공사비는 2,500만 루피였다. 트러스트 방식 보다 불과 10% 정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1943년 개통 당시 이 다리는 ‘신하우라교’라 불렀으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이름을 따 1965년부터 ‘라빈드라교’로 개명됐다. ‘하우라교’는 개통 당시에 노면 전차를 운행했지만 1970년에 철거됐다. 1992년에는 4Km 정도 하류에 통칭 ‘제2 후글리교’, 정식 이름은 ‘비디야사가르교’인 사장교가 새롭게 가설 되었다.

‘하우라교’는 해가 넘어간 저녁에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우라교’ 밑을 흐르는 후글리 강에 어둠이 깔리면 수많은 인도인들은 물속에 몸을 담근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의 수행자처럼 후글리 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다. 후를리강에 비친 하우라교의 검은 실루엣과 인도인들의 목욕하는 장면은 ‘하우라교’가 만든 인도의 속살이기도 하다. 하우라교는 2005년 4월 최대 250명의 근로자가 참여하여 6개월 동안 3만 리터의 페인트를 다리에 도장했다고 한다. 2006년 11월에는 하우라교 역사상 처음으로 네델란드와 독일에서 온 750만개의 조명으로 주변 조명장치 작업도 마쳤다고 한다.

영국 교량기술과 만난 인도산 철강재


영국의 교량기술과 인도산 철강재가 만나 건설된 ‘하우라교’를 지켜보면, 포스코의 ‘인도 오리사주 일관제철소’ 건설이 떠오른다. 한국인의 철강기술이 인도에서도 빛을 발할 것인가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고대 야금기술의 보고였던 인도. 21세기 세계 최고의 철강 경쟁력을 갖춘 한국. 어딘지 공통된 느낌이 강하다. 내친김에 포스코의 인도 일관제철소 건설이 잘 완성돼서 오리사주 시내 한 복판에 ‘철 기둥’을 세우고 ‘한국인의 철강기술로 만들었다’는 글자를 새기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인도는 지금 연산 3억 톤에 달하는 철강 생산량을 구축하기 위해 국가 전체가 철강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철강 국가로 부상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