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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파만파] 시오니스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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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파만파] 시오니스트는 누구인가

유대인만 시오니스트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시오니스트다.(I don't believe you have to be a Jew to be a Zionist. I am a Zionist.)

로이터 통신 칼럼에서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미국 현직 대통령의 말인가 의심했다. 전쟁 중인 이스라엘을 방문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 한 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가톨릭계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다. 그들과 유대인은 오래도록 편치 못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시오니스트라고 고백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들의 옛 땅에 대한 열망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의 옛 이름인 시온(Zion)은 원래 그곳의 여러 언덕 가운데 하나였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2000년 동안 그 언덕으로 돌아가길 소망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곳의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도들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고난에 시달렸다. 박해는 1492년 스페인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유럽에서 내몰린 유대인들의 일부는 옛 선조들의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숨어들었다. 유럽 유대인들의 첫 이주였다.

시오니즘과 핍박의 강도는 반비례했다. 박해가 잦아지면 시오니즘의 꼿꼿함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유대인들은 18세기 하스칼라(유대 계몽운동)를 통해 서구 문명에 동화하려고 들었다. 그들은 시오니즘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방 땅에서 평온한 삶을 원했다.

그러나 19세기 들면서 유럽 내 분위기가 다시 냉랭해졌다. 특히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탄압은 혹독하기로 악명 높았다. 헝가리의 유대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해 “팔레스타인에 우리 땅을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시오니즘의 시작이었다.

이후 알리야(유대인 이민)로 알려진 대규모 이주가 시작됐다. 1차 알리야는 1881년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유대인들로 이루어졌다. 이후 20여 년 동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옛 땅에 수십 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들이 주로 농사를 지었기에 1차 알리야를 ‘농업 이민’으로 부른다. 유대인들은 땅을 사들였고, 히브리어로 된 신문을 발간했다. 히브리어는 구약성경과 탈무드를 읽기 위해 간직해온 그들의 언어다.
2차 알리야(1904~1914년)에는 4만 명에 이르는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가운데 하나인 지중해 야파항 인근에 텔아비브라는 새 유대인 도시를 건설했다. 1922년에 이르자 팔레스타인 인구의 11%가 유대인들로 채워졌다.

문제가 생겼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원주민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던 영국은 두 개의 분할 국가를 세우려 들었다. 땅의 원주인이었던 아랍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자신들만의 영토를 갖기 원했던 유대인들의 투쟁은 홀로코스트라는 빚을 진 유럽과 미국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유엔은 1947년 11월 29일 이 지역에 두 개의 국가를 세울 것을 의결했다. 아랍인들의 반대는 극렬했다. 이스라엘 민병대가 100명의 아랍인을 살해하자 그들은 77명의 유대인을 죽이는 것으로 보복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이후 네 차례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 중이다. 하버드대 미국 정치 연구소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0%가 하마스의 궤멸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하마스가 저지른 폭력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을 극단적 저항으로 내몬 이스라엘의 폭압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들의 선조들은 유럽에서 박해를 당했다. 그 설움을 고스란히 팔레스타인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보복의 악순환만 부를 뿐이다.


성일만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texan509@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