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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시중드는 내시는 고려 때 시작…중국 로마 인도 이집트 유럽 등에도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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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시중드는 내시는 고려 때 시작…중국 로마 인도 이집트 유럽 등에도 존재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사극 속의 '내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남자라면 고자의 전유물인 고자질을 해서는 안 된다?

조선시대 효자동에 마을 형성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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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놈이 고자질하면 못 쓰는 거야”

중장년의 남성이라면 어렸을 적에 많이 들어 본 말 일 겁니다. 남의 잘못이나 비밀을 일러바치는 행동을 고자질이라고 하는데, 사내 즉 남자가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그 이유가 그럴듯합니다.
고자질이란 한자(漢字)의 고자(鼓子)와 행위를 나타내는 순 우리말인 ‘질’이 합쳐진 말입니다. 고자란 북 고(鼓)에 놈 자(子), 직역을 하면 ‘속이 텅 빈 북과 같은 놈’이지만 실제로는 남성의 생식기가 아예 없거나 고환이 없어 생식이 안 되는 불완전한 남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몰래 일러바치는 짓을 바로 ‘고자질’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남자라면 고자의 전유물(?)인 고자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던 것이지요.

우리는 사극 드라마에서 이따금 고자를 만납니다. 이들은 대개 검정의 우중충한 옷을 입고 임금 옆에 구부정한 자세로 서있거나 종종 걸음으로 임금 뒤를 따르곤 합니다. 이들이 내는 말소리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어렵고, 뽀얀 얼굴에 수염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 고자를 궁궐에서는 ‘내시’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내시부에 소속된 ‘환관’이라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궁궐 조직의 하나인 ‘내시부’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지요. 이곳에는 궁궐에서 시중드는 사람들로서, 환관 외에도 궁녀와 특별 임무를 지닌 궐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조선 시기에 들어서면서 내시부의 대다수가 환관으로 채워지게 되어, 환관을 그냥 내시라 부르게 된 것이지요.

몸은 비록 비정상이긴 해도 이들은 최고 권력기관인 궁궐에서 근무를 하며 일정한 직급도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홀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궐 밖의 대다수 서민들은 ‘불알 까서 빌어먹은 놈’이라며 천대 시 여겼습니다. 그런 수군거림을 내시라고 모를 리 없고, 자연스럽게 내시들끼리 모여 부락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경복궁 근처에 가면 <효자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화자촌’이라 불리던 곳입니다. ‘화자’는 내시를 비하하는 말로, 한자로 ‘불 火’를 씁니다. <불 火>를 파자하면 ‘사람 人’ 양 옆으로 두 개의 점이 떨어져 있습니다. 즉 사람에게서 불알 두 쪽이 떨어져 나갔다고 하여 ‘화자 火者’라 했으니 뜨거운 불과는 전혀 상관없는 화자가 되겠습니다. 여하튼 이런 화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화자 촌’이라 불렀다가 일제 강점기에 효자동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종합해 보면 고자의 다른 이름으로 <환관> <내시> <화자>가 있었던 것이고 이밖에도 ‘엄환’ 등 몇 개가 더 있지만 설명을 생략키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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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는 왕조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왕과 왕의 많은 여인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머무는 궁궐을 지탱하자면 무수리나 상궁들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사지 멀쩡한 남자들이 여자들만 있는 궁궐 깊숙한 곳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내시는 왕조제국이었던 로마를 비롯하여 인도·이집트·유럽의 각 제국에서도 존재하였고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신라 때 전래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시의 보편적인 임무는 왕과 그 가족의 뒤치다꺼리와 호위였습니다. 이들은 왕명을 전달하는 일에서부터 궐내에 반입되는 각종 물품의 관리감독과 궁궐 보수 공사 및 주요 건물의 호위병 역할을 하였습니다. 물론 임금의 후궁들을 보호하고 수발 드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지요. 이처럼 허드렛일을 할망정 권력의 지근거리에 있는 내시들이었기에 가장 확실하고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역모나 국가 변란의 중심에 이들이 무게 있게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해서 직책으로는 별 볼일 없지만 업무 성격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정기적인 훈련과 시험을 거쳐 내시로서 최고 관직인 종2품 ‘상선’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내시에게 주어지는 벼슬자리는 종9품에서 종2품, 총 60석입니다.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른 내시들을 특별히 ‘환관’이라 불렀고, 직급에 따라서는 상선, 상온, 상다, 상책, 상호 등 별칭을 가졌습니다. 60명을 제외한 나머지 내시들은 예비관원들로서 관직이 빌 때까지 대기해야 했으며, 대기하는 동안 환관들의 업무를 보조하고 시험공부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들의 시험 과목 중에 실기 시험도 있었는데, 쌀가마 지고 담장 넘기와 왕명 전달이 그것입니다. 쌀가마의 무게는 보통 80킬로그램으로 웬만큼 건장한 남자도 지기 어려울 텐데 그걸 지고 담장을 신속히 넘어야 했던 까닭은, 궁궐에 변란이 생길 경우 왕을 업고 담장을 넘어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왕명전달 실기시험은, 주어진 내용을 본 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말로 혹은 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왕명을 어찌 전달해야하는지를 시험을 통해 상기시켜주는 필수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궁궐 생활이 천직이었던 내시들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요. 가까운 중국의 예를 살펴보면 세 부류의 내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들입니다. 사로잡힌 포로 중에 허약한 사람은 현장에서 죽이고, 나머지는 공사부역 및 노예로 넘겼으며, 그 중 건장하고 다소 온순한 포로들은 거세시켜 내시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부모의 요청으로 어려서 고환을 자르고 내시의 길로 들어 선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죄를 지어 ‘궁형’을 당한 자이지요. 궁형이란 남자의 생식기를 절단하는 형벌로, 궁형 후 살아날 확률은 반도 되지 못했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형 대신 궁형을 당하고 살아 있는 동안 저 유명한 <사기>를 완성 시킨 장본인입니다. 아무튼 세 부류의 내시 중에 관직에 오를 확률이 많은 쪽은 역시 어려서 고환을 제거한 내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려 때 궁형이 시행되어 타의적인 내시가 양산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자발적으로 내시가 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궁궐에 들였습니다. 이는 대를 이어 내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내시는 중국과 달리 여자를 얻어 정식으로 혼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혼인 후에는 대개 양자를 들였으며, 양자는 주로 가난한 집안의 어린아이였습니다. 양자로 들어오면 어린아이는 고환과 성기 사이를 명주실이나 머리카락으로 단단하게 묶이게 되어 점점 자라면서 고통 없이 자연스럽게 고환을 뗄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일찍이 내시 아버지에게 궁궐의 법도나 생활을 배우게 되어 순조로운 내시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내시들은 양자를 들이긴 해도 내시로 만들지 않고, 그 자식이 출세하여 원만한 가정을 꾸미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가 좋은 예일 것입니다.

한편, 관직을 가진 내시의 아내들은 한 결 같이 아름답고 지적 수준이 높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국가에 죄를 지어 집안이 망하면, 여자와 아이들은 관노가 되거나 양반집 몸종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차라리 몸도 덜 더럽혀지고 사는 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내시에게 재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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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내시는 일찍 늙고, 빨리 죽는 편입니다. 유아기에 거세당한 경우는 적응기를 거쳐 별 문제 없지만, 청소년기나 성인이 되어 거세를 당하면 호르몬의 비정상 분비로 몸집은 급격히 비대해집니다. 예전 당나귀나 말을 거세시킨 것도 같은 이유겠습니다. 또한 얼굴에 털은 사라지고 목소리도 변성되며 몸짓이 여성화 되면서 종종 걸음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왕조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내시’들이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기에 살펴 본 내시의 삶이었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