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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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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다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279)]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의미

사랑과 용서는 자기 기준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상대를 배려하며 행해야 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사랑과 용서는 자기 기준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상대를 배려하며 행해야 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다시 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밀양'은 2007년 개봉됐다. 당시 이 영화에서 주연 신애 역을 맡은 배우 전도연이 ‘제60회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큰 화제가 됐을 만큼 명화다. 2019년 10월 3일자 칼럼에서 필자도 '밀양'을 소재로 용서에 관한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논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시각, 즉 기독교적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영화는 원래 유명한 소설가 이청준님이 1985년 발표한 '벌레 이야기'가 원작이다. 그러니까 소설이 발표된 지 22년이 흐른 후 이창동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했다. 사실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와 영화 '밀양'은 많이 다르지만 특히 주인공과 결말 부분에서 많이 다르다. 영화와 다르게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남편이 화자가 되어 아내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또 결말 부분에서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아내가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만, 영화에서는 소설에 없는 카센터 주인 남자가 주인공 ‘신애’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으로 끝난다. 이 글은 원작 소설을 중심으로 주제에 접근해 보겠다.

"이미 나는 용서받았으니 너의 용서는 필요없다"는 말 궤변에 불과


'벌레 이야기'는 기독교를 배경으로 용서란 어떤 것인지를 깊이 탐구한 수작(秀作)이다. 아마도 이청준님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이런 소설을 쓰게 된 동기도 됐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들이 용서와 사랑의 본질을 제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지만, 특히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가 근본이다. 하지만 원작에서 보듯이 많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조차 용서와 사랑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 설령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그 본질대로 살아가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끔찍한 범죄로 외아들 알암이를 잃은 어머니다. 실종된 후 백방으로 찾던 외아들이 두 달이 지난 후 결국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다. 시신의 모습으로 보아 아이는 유괴되어 피살된 것이 분명했고, 결국 아들이 다니던 학원 원장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진다. 범인은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처음 기독교에 귀의(歸依)하도록 전도한 여성에게서 범인을 용서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은 어머니는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얼마쯤 지나 교회에 다니면서 결국 범인을 용서하려는 마음까지 갖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용서했다는 증거를 원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것을 지금까지 원망과 복수심의 표적이던 범인을 대상으로 구하려고 했다. 결국 남편을 설득한 어머니는 교도소로 범인을 찾아가 자신이 직접 용서하려고 계획한다. 면회를 다녀온 어머니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과 상실감에 빠져 앓아눕고 말았다. 후에 어머니는 그 이유가 범인의 뻔뻔함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용서와 사랑의 본질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본질대로 사는 것 어려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예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그의 죄가 나 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그녀의 고뇌는 본인이 스스로 용서를 선포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먼저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자신이 제일 먼저 살인자에게 용서의 손을 내밀어야만 증오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마음속의 외침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표현을 빌리면 "아내의 심장은 주님의 섭리와 자기 '인간' 사이에서 두 갈래로 무참히 찢겨나가고 있었다."

외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사형 집행 전에 남긴 말이 결국 어머니를 완전히 절망의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 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하여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에 인도해 주시고 살아남아 고통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 주십사고…." 살인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부인은 이틀 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다. 자신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살인마가 오히려 자신을 가련하게 여기고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인은 더 이상 삶을 지탱할 힘을 잃고 절망의 깊은 심연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부인은 범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하나님을 통한 진정한 회개(悔改)와 용서(容恕)는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회개를 통한 용서와 구원(救援)의 문제는 이 칼럼에서 간단하게 설명할 내용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범, 어머니,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 모두 하나님의 용서의 깊은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살인범은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해 주셨다고 '성자(聖者)'와 같은 '뻔뻔한' 모습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으로 오히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고 걱정하고 있다. 이 살인범은 하나님의 용서의 의미를 오직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만 찾았다. 그래서 자기가 죽인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부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라고 성자와 같은 뻔뻔한 모습으로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는 이런 모습일까?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함께한다.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완전한 사랑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서에는 "눈에 보이는 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고 있다(요한1서 4:20). 즉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와 비슷한 교훈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라고 예수께서 가르치고 있다. 예배보다 앞선 것이 화해(和解)라고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웃과 원수가 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다"는 예수의 준엄한 교훈이다.

회개 통한 용서를 구한다면 진심어린 사과가 우선돼야


만약 살인범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면 그에게서 자신의 범죄로 외아들을 잃고 절망 속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고통이 보였어야 한다. 아니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면 당연히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찾아준 어머니에게 진정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고통에 공감을 표하고 위로해 주었어야 한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너의 용서는 필요 없다"는 식의 뻔뻔한 모습은 절대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을 준 이웃에게는 사과하지 않고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인자한 미소를 띠는 것은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궤변(詭辯)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위로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하나님의 용서는 모르지만, 어머니에게 철저하게 진심 어린 사죄를 했다면 어머니까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른 꼴이 되었다.

동족의 고혈(膏血)을 빨아 치부하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세관장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즐거워하며' 삶이 변한다. 그는 큰 소리로 외친다. "지금 당장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방식으로 빼앗은 재산은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와 만난 삭개오의 삶에서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았던 이웃들의 강퍅한 삶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그들과 즉시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만난 삶이라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많이 알고 있는 유명한 성서의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이웃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예수가 이해하기 쉽게 답을 대신해 설명한 것이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맞아 죽을 지경으로 상처를 입고 길에 버려져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천대를 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주고 여관에 데려다주며 주인에게 치료비를 물어줄 것이니 돌보아 주라고 요청했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종교는 이미 사이비(似而非)다. 영화 '밀양'에서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죽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은 노총각 카센터 사장의 진정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소설 '벌레 이야기'와 영화 '밀양'의 진정한 차이이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