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김원웅 광복회장의 8·15 기념사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촉발된 ‘토착왜구’ 논란은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글로벌이코노믹은 세계의 식민주의와 반식민주의 발전을 되짚어 보고 각국이 식민 논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사례를 찾아본다. [편집자 주]
프랑스 식민제국은 16세기부터 지속된 프랑스 본토와 프랑스 지배 하의 식민지, 보호령, 위임통치령으로 구성된 식민지다. 초기 프랑스의 식민 정복에서 1814년까지 존재한 국가를 제1식민제국으로 부르고, 1830년 알제 정복으로 시작된 제국을 제2 식민제국이라 부른다. 제2 식민제국은 1955년 베트남과의 전쟁, 1962년 알제리와의 전쟁, 그리고 1960년 이후의 탈식민지화로 붕괴했다.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제국, 네덜란드 제국과 초기에 경쟁하다가 이후에는 대영제국과 경쟁하면서 프랑스는 17세기 초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인도 등지에 누벨프랑스나 프랑스령 인도같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18세기, 그리고 19세기 초 대영제국과 다른 유럽 열강들과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초기에 정복한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1850년 이후부터 프랑스는 새로운 제국을 재건해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 남태평양에 집중적으로 식민지를 설립했다. 공화주의자들은 초기에 제국 건립에 반대했으나 독일이 식민지를 확장함에 따라 제국의 건립을 지지했다. 제국이 발전함에 따라 제국은 프랑스와의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교역은 식민지는 원료를 공급하고 완제품을 구입하는 방식이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에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부여하고 프랑스 문명과 언어, 그리고 가톨릭을 전파했다. 프랑스 식민지는 양차 대전 동안 프랑스에 병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기독교와 프랑스 문화를 가져옴으로써 프랑스의 기준을 세계적인 것으로 올리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1884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식민주의자였던 쥘 페리는 "고위층은 낮은 계급에 우월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열등한 인종을 문명화할 임무가 있다"라고 선언했다.
식민지 주민들에게 시민권이 제공되었지만 실제로 이 시민권은 약해졌고, 식민지 주민들은 시민이 아닌 피지배층처럼 대우받았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제외하고 이전의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 그리고 동시대의 영국과는 달리 제국에서 소규모의 개척자들을 파견했다. 알제리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파견되었지만 여전히 지역 내에서 프랑스인은 소수였다. 범위로 보자면 프랑스 제국은 가장 큰 제국 중 하나였다. 프랑스 본토를 포함하여 1920년 프랑스의 주권이 미치는 지역의 영토는 13,500,000㎢에 달했고, 1939년 인구는 1억1000만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샤를 드골과 자유 프랑스는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위해 식민지를 거점으로 삼았는데, 역사학자 토니 체퍼는 "프랑스가 패배와 점령의 설욕 이후 강대국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그들은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해외 제국을 유지하기를 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반식민지 운동이 유럽의 열강들을 위협했고, 1946년 10월 27일 프랑스 헌법은 프랑스 연합을 설립했지만 1958년까지 유지되었고 식민 제국에 남은 프랑스 지역은 프랑스의 해외 영토와 데파르망에 통합되었다. 이 지역은 1939년 제국 영토의 1% 밖에 되지 않는 119,394㎢의 영토를 보유했으며 2013년에 인구는 270만 명이었다. 1958년 프랑스 공동체가 발족했으나, 1970년대부터 마지막 제국의 소유 지대는 프랑스에 이익이 적은 지역이었다고 로버트 알드리히는 얘기한 바 있다. 그는 "알제리의 트라우마적 탈식민지화를 제외하면 프랑스가 오랫동안 지속해 온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주목할만한 점이다"이라고 주장했다. 1980년 바누아투가 독립하면서 프랑스 식민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대영제국(大英帝國) 또는 영국제국(英國帝國)은 15세기 유럽인들이 해양을 통해 유럽 밖으로 진출한 대항해 시대 이후 1931년 영국이 성립할 때까지 영국에 복속되거나 영국이 건설한 세계 각지의 식민지와 통치 지역을 거느린 제국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1921년 당시 전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4억5800만 명 이상의 인구와 지구 육지 면적 4분의 1에 해당하는 대략 35,500,000㎢의 영토를 차지했다.
그 결과 영국은 가장 거대한 식민지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영토(식민지 포함)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영국령 식민지의 규모에 기인하여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많은 영토가 독립해 나갔으며, 현재는 영국 본토인 그레이트 브리튼섬과 북아일랜드, 잔류 해외 영토 등을 제외한 대부분이 독립하여 영국 연방의 형태로 남아있다.
1939년 9월, 영국은 나치 독일에 반대한다는 적대 선언을 하였다. 직할 식민지들과 영국령 인도제국 등 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와 자치령도 독일을 적국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전년도에 협정한 영국 해군 철수 조약항에 따라 법률상 전쟁기간 동안 죽 중립 상태로 남아있기로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동맹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로버트 멘지스는 영국의 선전포고에 자동으로 오스트레일리아도 동참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멘지스는 처칠이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중동에서 혹사하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였다. 멘지스의 후임자 존 커틴은 영국에 대해 뿌리 깊은 환멸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그는 독자적으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보몽이 지적한 것처럼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1941년 12월 7일 커틴은 미국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더는 자국의 이익을 영국의 이익보다 아래에 두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였다. 이로써 제국 전체가 전쟁에 말려들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군수품과 인적 자원을 뽑아냈다.
자치령들은 유럽에서의 공중전을 위해 많은 항공기 승무원들을 파병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캐나다에서 훈련을 받았다. 다국적으로 이루어진 영국 제8 육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군과 싸웠다.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에 참전하여 일본과 싸워서 미국의 승리를 도왔다. 인도 사람들의 자치와 주권을 얻기 위하여 마하트마 간디와 수바시 찬드라 보스가 이끄는 인도 국민 회의파가 40년에 걸쳐 독립 운동을 지휘한 끝에 1947년 8월 마침내 영국령 인도 제국이 종식되면서, 대영 제국은 가장 크고 값진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상실해버렸다.
무하마드 알리 지나가 이끄는 이슬람교도 연맹은 로비에 성공하여 무슬림 지역을 인도에서 떼어놓아 파키스탄을 건국하였고, 인도의 분할은 대량의 인구 교환과 광범위한 폭력 사태를 낳아 수십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는 1948년에 끝났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영토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게 됐다. 1952년 7월에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나세르는 4주년을 맞이하여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수에즈 운하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
그러자 격분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비밀협정을 맺어 수에즈 운하를 탈환하려고 계획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은 갑자기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 운하로 진격했다. 다음날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이집트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운하 입구에 있는 도시 포트사이드를 공격했다.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이집트는 일부 영토를 잃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그해 12월 22일 두 나라 군대 모두 이집트에서 철수했으며 이스라엘군도 1957년 3월에 철수했고, 미국이 막대한 경제원조를 중동에 제공하면서 그 공백을 메우게 된다.
이 사건으로 나세르는 전쟁에 지고서도 아랍의 영웅이 되었던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지역에 행사하던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며 아르헨티나 부근의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전쟁(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영국군은 기동부대를 파견했고 유엔 사무총장의 조정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포클랜드 섬에 상륙,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쟁탈전에서 영국은 포클랜드 섬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으나 두 달에 걸친 격렬한 전투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전쟁으로 1000명 이상이 사망했을 뿐 아니라, 포클랜드 제도를 방위하기 위해 주민의 두 배가 넘는, 약 4000명의 영국군을 주둔시켜야 했다.
1984년 홍콩 반환 협정에 따라 홍콩은 199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당시 홍콩 반환 행사에는 찰스 왕세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홍콩의 반환으로 사실상 영국은 식민주의의 종언을 맞게 된다.
일본 제국은 1868년 1월 3일부터 1947년 5월 3일 사이의 일본의 입헌 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특수한 정치 체제(국가 체제), 혹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의미한다. 일본 제국은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 정책과 유사하게, 군비를 확충하여 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나 식민지 침략을 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확장에는 대한제국의 강제합병 경우처럼 군사력에 바탕을 둔 강압적 방법으로 실행한 경우도 있고, 만주와 같이 전면전을 통한 경우도 있었다.
침략한 지역에는 식민지 정책으로 현지 주민들을 제국 본토인과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했지만, 차별 정책도 병행했다. 제국이 확대되면서 일본 본토는 내지(內地)로, 식민지는 외지(外地)로 구분했다. 내지는 정부가 관할하지만, 외지는 총독부(總督府)와 같은 식민통치기관이 정책을 수행했다.
사할린섬 이외의 식민지에서는 총 인구에서 내지인(제국 본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 이하였다. 그밖에 여러 이유로 가라후토청 이외의 식민통치기관은 독자적인 입법권을 수행했으며, 관동주와 남양군도는 형식적으로는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으므로 일본 제국 헌법의 효력이 미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팽창한 국토는 제국이 패망하면서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쇼와 시대에 확장된 영토의 대부분과 이전에 확장한 영토의 일부가 독립하거나, 미국, 중화민국 등에 의해 점령되었고, 일부는 이전의 국가로 흡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 탈식민주의, 제3세계 운동의 바람이 불고 열강 구조가 재편되며 강대국들의 식민지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2차대전 패전국의 식민지는 독립한 곳이 많으며, 승전국의 식민지도 거대한 곳은 독립해 나가고 오세아니아나 카리브 지역, 남미, 아프리카 등지의 작은 섬만이 남은 상태다. 오늘날에는 식민지로 부르기보다는 '속령', '해외 영토'라고 지칭하는 편이다.
제국주의 시대와 차이점이 있다면 오늘날 옛 제국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식민지에서 식민주의적 정치 지배구조를 청산하고 군사와 외교 분야를 제외한 자치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옛 식민제국은 대부분 본국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했기 때문에 이를 자신들의 식민지 지역에도 적용해, 현지인 유권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선거를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자치정부를 구성해 내정을 완전히 현지인에게 맡기는 형태다. 비교하자면 19세기~20세기 초반 대부분의 식민지에서는 대영제국의 자치령 정도를 제외하면 현지인의 자치가 허용되지 않았고, 현지인이 제한적으로만 식민지 정치에 개입할 수 있거나 그것마저 원천봉쇄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오늘날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서방 국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속령들은 독립운동의 열기가 강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들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이 폭력으로 독립을 추구하지 않는 한 독립운동을 강압적으로 탄압하는 경우는 드물며, 대신 경제원조를 더 해주겠다거나 다른 회유책으로 이들을 달래고 있다. 그리고 정말 본국이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 열기를 막을 수 없다면 주민투표 등을 통해 독립의사를 묻고, 찬성표가 더 많이 나오면 독립 절차를 밟아 독립시키고 대신 본국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러시아와 중국, 이란 북한 등의 반미, 반서방 성향의 국가들은 이 지역들을 문제 삼으면서 UN 등지에서 이 지역들의 소유국인 서방 선진국들을 향해 현재까지도 제국주의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며 비난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전세계 개발도상국 진영의 리더로서 역할을 자임하는 중국은 다른 반미, 반서방 국가들보다 더욱 강하게 서방 국가들을 비난하고 있다. 북한 역시 오래전부터 반제국주의, 탈식민주의적 자주 노선을 자국 외교의 핵심 방향으로 삼아왔던 터라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방 국가들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오늘날 식민지 설치 행위는 국제법상 전쟁범죄로 간주될 수 있다. 결국 식민주의는 20세기의 유산이었고, 식민모국의 정책에 따라 식민 이후의 시대가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우리나라는 아직 일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세계의 사례도 식민주의의 완전한 극복은 사회적 책임이지 이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한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