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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목표는 우크라의 나토 가입 차단...돈바스만 점령해도 이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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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목표는 우크라의 나토 가입 차단...돈바스만 점령해도 이긴 것"

이교관 한국국가대전략연구원장 러·우크라 전쟁 특별기고

지난 3월 28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분쟁으로 파괴된 건물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3월 28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분쟁으로 파괴된 건물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의 대소련 냉전 전략인 '봉쇄(containment)'의 기획자였던 조지 F. 케넌은 그의 저서『미국 외교 50년』에서 "전투에서는 승리라는 것이 있을 수 있으나 전쟁에서는 목표를 달성했느냐 여부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어떤 전쟁이든 일으킨 나라가 당초 목표로 했던 것을 달성했는지 여부가 승전이냐 패전이냐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한 달 전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시작한 뒤 지속해 왔던 수도 키이우(키예프) 공략에서 돈바스를 중심으로 한 동부 지방 공략으로 이행하기로 한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미국과 서구의 대다수 언론 논조대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거센 저항에 밀려서 키이우(키예프) 점령에 실패한 나머지 친러 성향의 분리주의자들이 다수인 동부 지방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전쟁에 대한 케넌의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클라우제비츠를 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서구 저널리스트들의 엉성한 결론으로 성급하게 판단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케넌의 앞의 언명을 기준으로 본다면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목표로 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때 모스크바의 전략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프러시아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On War)』에서 "전쟁은 국내 정치의 연장이자 또 다른 수단"이라고 했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거두고자 한 국내 정치적 목표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러시아의 국가적 목표로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 미군의 우크라이나 주둔 가능성이 높은 만큼 러시아로서는 어떻게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차단을 통해 그 같은 위협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 카네기평화재단 로버트 케이건은 저서 『역사의 귀환과 깨진 꿈』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미군이 주둔할 가능성을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한다"고 평가한다.

다른 하나는 푸틴의 개인 목표로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해 러시아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친(親) 서구 엘리트들까지 반대하고 있어 그로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푸틴이 이번 전쟁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우크라이나를 완전 점령해 속국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정한 영토를 점령해나가면서 우크라이나와 평화 협상을 갖고 나토 가입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중립국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협상이 진행돼 왔다. 서구 언론의 논조대로 만약 키이우(키예프) 점령이 푸틴의 침공 목표였다면 러시아는 개전 초기에 벌써 중장거리 탄도미사일로 우크라이나 대통령궁과 군 지휘부 시설을 궤멸시켰을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에 정밀 탄도 미사일을 수출하는 탄도 미사일 강국이다.

이 점에서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거두려는 것은 '완전한 승리(a full victory)'가 아니라 '제한적 승리(a limited victory)'인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양국 평화협상은 우크라이나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요구가 관철되고 있는 국면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배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전쟁이 앞으로 세계 질서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이고 그 변화에 한국의 새 정부와 기업들이 국익과 기업 이익을 위해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하느냐는 것이 최대 의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최대 우크라이나 전쟁이 향후, 아니 지금 세계 질서, 특히 미중 패권 경쟁과 유럽의 지정학적 구도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틴 목표는 우크라 나토 가입 차단…돈바스만 점령해도 '승리'


이 문제는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의 주요 나토 동맹국들이 왜 러시아의 침공이 100% 예상되는데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추구했느냐는 의문을 풀지 않고는 정확하게 진단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상황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것은 앞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본격 추진돼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을 초래한 2014년 2월이나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월 다시 미국과 나토의 주요 의제가 됐을 때나 우크라이나가 당장 나토에 가입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러시아의 안보 위협이 현실적으로 대두되었느냐 여부이다. 이에 대한 진실은 정반대로 파악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가입하면 러시아의 침공 위협이 증대되고 가입하지 않고 서구와 완충 국가(buffer state)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면 그 같은 위협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평가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그의 저서 『세계 질서』에서 내린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모스크바로부터 수백 마일 안에 있는 우크라이나로의 나토 확장은 안보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추진돼 왔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키신저의 얘기는 나토의 동유럽 확장이 이 지역의 안보를 지켜주겠다기보다는 러시아의 정치․경제 체제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키신저는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미국의 외교가 균형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외교를 구식 외교로 배척하고 서구 가치들을 확산시키는 위험한 외교로 대체되고 있다." 키신저에 앞서 나토의 동유럽 확장 시도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미 외교 전략가는 바로 케넌이었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가 나토의 동유럽 확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시기인 1997년 2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이렇게 경고했다. "나토의 동유럽 확장은 탈냉전 시기 미 외교 정책의 최대 실책이 될 것이다." 케넌은 스트로브 탈보트 국무부 부장관이 1996년 10월 나토 확장 관련 강연을 가졌을 때에도 참석해 위와 같은 경고를 제기했다. 존 미어세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그의 저서 『미국 외교의 거대한 환상』에서 클린턴은 이를 전해 듣고 스트로브와 상의했으나 케넌의 경고는 끝내 무시됐다고 전한다.
지난 3월 28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현지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건물 밖에서 빵을 먹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3월 28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현지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건물 밖에서 빵을 먹고 있다. 사진=로이터


주목해야 할 점은 나토의 우크라이나로의 확대는 나토의 창설 목적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마이클 오핸런은 그의 저서 『평화 시대의 전쟁론』에서 나토의 창설 목적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나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단합된 서구의 목표로서 세계의 핵심 산업․경제․군사 지역들이 적대국(소련)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으로서 이는 케넌과 나토 지도자들의 비전이었다." 이 점에서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W. 부시 대통령이 2008년 나토 회원국들에게 우크라이나를 언젠가 가입시키겠다고 한 약속에 대해 비판적인 심경을 토로했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너무 먼 다리로 여겨졌으며 지금은 존재 않는 소련에 맞서기 위해 군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켜주기 위해 미국과 나토 군사력을 이 눈 내리는 나라에 파견하겠다는 것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 아닌가."

국제정치학자로서만 살아 와 미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기가 쉽지 않은 오핸런이 이렇게까지 비판한 데는 러시아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등이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킬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의 대응이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놀랍지 않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 러시아가 침공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나토 주요 동맹국들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반격할 것이 확실하게 예상되는데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서구가 러시아를 얕잡아 본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 월트 미 하버드대 교수는 그의 저서 『미국 외교의 대전략(The Hell of Good Intentions)』에서 클린턴이 나토의 동구 확장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나 부시가 ABM(반(反)탄도미사일협정)에서 탈퇴하고 동유럽에 ICBM을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가 힘이 약화된 나머지 강력하게 반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러에겐 미국 주둔 가능성이 가장 큰 위협
완전 승리 아니더라도 완충지대 만들면 성공

이에 대해 오핸런은 미국의 이 같은 러시아 평가는 절대적으로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미국 내 전략 써클들의 다수는 중국을 증대되는 위협으로 인식하는 반면 러시아는 쇠퇴하는 위협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그 같은 평가는 지전략적 축의 지위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과 공업에서 세계적 수준의 전통들을 유지하고 있는 인구 1억4000만 명의 핵 강대국인 러시아에 대한 평가로서는 기이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러시아가 중국보다 향후 몇 년은 물론이고 어쩌면 수십 년 간 미국과 서구의 메이저 도전 국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같은 러시아 위협론은 이번 전쟁으로 고조될 것이다. 이미 나토에 가입한 폴란드와 루마니아, 헝가리 등 동구 국가들도 이번 전쟁을 통해 나토 회원국이 침공 당하면 전 회원국이 지원한다는 나토 협약 5조가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당혹감에 휩싸여 있다. 이에 대해 크림반도 병합 이후 동구를 다녀 온 미 국제정치 전문가 로버트 D. 캐플란은 그의 저서 『유럽의 그늘에서』에서 이렇게 전한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2014년 크림반도 병합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라는 완충 국가가 사라짐에 따라 졸지에 러시아와의 최전선에 선 나라가 되어버렸다면서 "신냉전이 시작됐다"고 한탄하더라고 전한다.

이번 전쟁으로 중부 유럽의 강국들까지 러시아에 의한 안보 위협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 것은 분명하다. 이는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가 러시아의 침공 사흘 째 1000억 유로를 군사력 증강을 위해 긴급 투입하기로 결정한 데서 확인된다. 이 같은 상황은 미국과 서유럽이 나토의 우크라이나로의 확장을 통해 목표로 했던 유럽의 안보가 거꾸로 더 악화했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그렇다면 어쩌다 세계질서가 이렇게까지 무너지게 된 것인가? 그것은 키신저의 냉정한 지적대로 미국과 서구의 나토 주요 동맹국들이 러시아를 만만히 여긴 나머지 핵강대국인 러시아와의 힘의 균형을 통한 유럽의 평화를 구현해나가는 전통적인 외교를 버린 데서 말미암는다.

다시 말해서 미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이상주의 외교 전략 그룹인 '블롭(the Blob)'이 클린턴 때부터 힘의 균형을 통한 전통적인 외교대신 추구해 온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 전략이라는 완전한 승리 전략이 실패한 결과인 것이다. 나토의 우크라이나로의 확장과 이를 교두보로 삼아 러시아의 권위주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와 완전한 시장경제라는 서구적 가치로 전환시키면 유럽이, 더 나아가 세계 전체가 안전해질 것이라는 블롭의 초현실주의적인 목표가 러시아라는 핵강대국의 저항에 직면해 좌초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가 독일 통일과 소련 연방 해체로 이어지면서 탄생한 탈냉전 질서는 이번 전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탈냉전 질서는 1648년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모든 국가의 영토 주권을 존중한다'는 정신의 베스트팔렌 체제에 기초했다. 하지만 베스트팔렌 정신을 먼저 위반한 것은 미국과 나토였다. 미국과 나토는 1999년 3월 코소보의 유고 연방 탈퇴를 안보리를 무시하고 개입해 차단했다. 미국의 나토 동구 확장에 반대해 온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과 결별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이후 옐친이 푸틴에게 정권을 넘겨주면서 러시아가 반서구 권위주의로 나아가게 만든 것도 미국의 나토 동구 확장과 코소보 개입이었다는 사실은 블롭의 완전한 승리 전략이 거꾸로 러시아의 퇴행을 초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토 동유럽 확장은 美 외교정책 실책될 것
폴란드·헝가리 "신냉전 시작됐다" 위협 느껴

베스트팔렌 정신에 대한 미국의 위반은 코소보 사태 개입에서 멈추지 않는다. 미국은 안보리 결의 없이 핵무기 개발 의혹을 명분으로 2002년 이라크를 침공한 데 이어 2001년 뉴욕 9‧11 테러를 자행한 알카에다와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제거를 명분으로 2004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과 나토의 베스트팔렌 정신 위반으로 흔들리던 탈냉전 질서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로 인해 본격적으로 위협 받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 때 탈냉전 질서는 무너졌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에 놀란 루마니아 사람들의 절규대로 탈냉전 질서가 신냉전 질서로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중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 진영과 미․서구를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 간 신냉전 질서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이번 전쟁으로 서구 가치의 확산을 통한 완전한 승리 전략이 패배한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3월 26일 바르샤바를 방문해 푸틴이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일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푸틴에게 우크라이나 침공 권리가 없다는 의미라고 수습했다. 그럼에도 바이든의 언급은 미국이 러시아의 정권 교체를 추구할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이는 미․러 대립을 더욱 증폭시킬 것이다. 오핸런은 푸틴이 미국의 러시아 내 다당제 증대 시도에 더 분개해 왔다고 말한다. 바이든은 최근 G7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의 G20 퇴출까지 언급했다. 이는 바이든이 나토의 우크라이나로의 확장이라는 완전한 승리 전략이 실패했는데도 푸틴의 실각 압박과 러시아의 경제 제재 강화와 세계 기구로부터의 퇴출이라는 완전한 승리 전략에 매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피해 오데사에서 온 우크라이나 난민 알렉산드라 우셴코가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멕시코로 가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피해 오데사에서 온 우크라이나 난민 알렉산드라 우셴코가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멕시코로 가고 있다. 사진=로이터


그렇다면 이제 미국은 어떤 전략이 요청되는 것인가? 그것은 키신저의 말대로 미국은 러․중을 상대로 힘의 균형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외교를 복원하는 것이다. 냉전 종식은 조지 H. W. 부시 행정부가 소련에 제한적 승리를 추구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바이든은 배워야 한다. 당시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고르바초프에게 나토는 동쪽으로 1인치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부시 대통령은 베를린으로 날아가 장벽 붕괴를 축하하라는 모든 제의를 거절하는 등 절제의 외교를 했다.

미국이 힘의 균형과 절제를 추구하는 외교라는 제한적 승리 전략으로 복귀한다면 독일의 국방비 증액은 영국과 프랑스가 우려하는 재무장의 길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독일의 국방비 증액이 푸틴의 계산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더 높다. 하지만 미국이 완전한 승리 전략을 고수해 러시아와의 대립과 갈등이 지속돼 독일이 군사 강국의 길을 갈 경우 서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할 뿐만 아니라 독일의 재무장으로 인한 안보 위협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 점에서 독일 재무장은 바이든의 계산 잘못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바이든, 러시아 정권 교체 추구 시사했지만
중국과 외교·경제에도 같은 기준 적용해야

나토의 본래 임무와는 관계없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추진한 블롭의 완전한 승리 전략은 엄청난 피해를 낳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물론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의 국민과 기업들이 유가 상승과 대러 교역 단절로 인한 큰 피해를 입고 있다. 북한의 3월 24일 화성-15형 ICBM 시험 발사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세계 질서의 혼란을 김정은이 적극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의 안보리 추가 제제 추진에 반대할 것을 알고 벌인 도발이었던 것이다. 이는 블롭의 대러 완전한 승리 전략 실패로 인해 한국의 안보도 위협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전쟁이 푸틴의 제한적 승리로 끝날 경우 미국의 중국과의 패권 경쟁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유럽의 안보가 불안정해질 것인 만큼 미국으로서는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에만 집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데이비드 샘보우 조지워싱턴대 교수가 그의 저서 『강대국들이 만나는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과의 패권 경쟁의 주무대인 남중국해는 갈수록 중국의 내해화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눌린 주변국들의 친중화는 가속화할 우려가 높다. 더구나 2012년 대통령직에 복귀한 푸틴과 그 다음해 국가주석이 된 시진핑은 그동안 30여 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간 교역을 비(非)달러화로 결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미국의 글로벌 패권에 맞서 양국 간 경제 및 군사 협력 체제를 강화해 왔다. 따라서 이번 전쟁이 끝나면 중․러 간 협력 체제는 동맹 체제로 강화되면서 새로운 대안 질서 구축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교관 한국국가대전략연구원 원장
이교관 한국국가대전략연구원 원장

한국의 새 정부와 기업들은 이 같은 세계질서 변화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혈맹인 만큼 바이든 행정부가 요구하는 각종 대러 및 대중 견제(blunting) 체제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도 미 요로를 통해 제한적 승리 전략의 외교를 추구할 것을 권고하는 지혜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미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왈츠가 그의 저서 『국제정치 이론』에서 말한 '현재의 파트너는 만족시켜 주되 잠재적 파트너는 즐겁게 하라'는 명제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새 정부와 기업들이 미국 몰래 이중 플레이를 하라는 게 아니라 극동 개발로 러시아판 아시아 회귀에 박차를 가해 온 러시아와의 외교 및 경제 관계가 언젠가 회복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이를 염두에 두고 신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중국과의 외교와 경제 관계에서도 똑 같이 해당되는 전략일 것이다.


이교관 한국국가대전략연구원장(신간 『패권충돌의 시대 한국의 대전략』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