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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공지능 업체들, 34억 달러 하드드라이브 동남아로 반입해 제재 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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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공지능 업체들, 34억 달러 하드드라이브 동남아로 반입해 제재 우회

동남아 데이터센터 통해 엔비디아 칩 활용...대만산 인공지능 칩 수입 전년보다 급증
중국과 미국 국기 사이에 중앙 처리 장치(CPU) 반도체 칩이 보인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중국과 미국 국기 사이에 중앙 처리 장치(CPU) 반도체 칩이 보인다. 사진=로이터
미국이 중국에 인공지능 칩 직접 판매를 막자, 중국 업체들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데이터센터에 있는 미국 칩을 원격으로 쓰려고 하드드라이브에 든 데이터를 직접 가져가는 우회 방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지난 12(현지시각)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이런 우회 방법이 퍼지면서 말레이시아의 인공지능 칩 수입이 크게 늘고 있다.

대만 국제무역청 자료에 따르면, 말레이시아는 지난 3월과 4월 대만에서 34억 달러(46500억 원) 상당의 인공지능 칩과 기타 프로세서를 들여왔다. 이는 지난해 전체 수입량보다 많은 양이다.

◇ 가방 속 하드드라이브로 80테라바이트 데이터 운반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지난 3월 초 중국 엔지니어 4명이 베이징에서 말레이시아로 떠나면서 각자 15개의 하드드라이브가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갔다. 이 하드드라이브에는 인공지능 모델을 훈련할 스프레드시트, 사진, 동영상 등 80테라바이트 양의 데이터가 들어있었다.
말레이시아 데이터센터에서 이 업체는 엔비디아의 고성능 칩이 들어간 서버 약 300대를 빌렸다. 엔지니어들은 가져온 데이터를 서버에 넣어 인공지능 모델을 만든 뒤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중국으로 가져간 결과물은 인공지능 시스템 출력을 안내하는 모델 변수를 포함해 수백 기가바이트 양이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중국 인공지능 업체는 말레이시아 계획을 세우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엔지니어들은 중국에서 8주 넘게 데이터를 다듬고 인공지능 훈련 프로그램을 조정했다. 데이터가 중국 밖으로 나가면 큰 수정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세관 의심을 피하려고 중국 엔지니어들은 하드드라이브를 4개의 서로 다른 가방에 나눠 담았다. 지난해에는 하나의 가방에 모든 하드드라이브를 넣고 여행했던 것과는 다르다.

◇ 동남아 우회 경로 확산

바이든 행정부에서 상무부 수출통제를 맡았던 테아 켄들러 전 관리는 "중국 업체들이 고성능 미국산 인공지능 칩에 원격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 계속 걱정했었다"고 말했다.

중국 업체들은 엔비디아와 공급업체들이 인공지능 칩의 최종 사용자를 더 엄격히 조사하기 시작하자 싱가포르 자회사를 통해 일하던 방식에서 말레이시아 법인을 통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 중국 업체는 쿠알라룸푸르에 법인을 만들면서 말레이시아 국민 3명을 이사로, 해외 지주회사를 모회사로 등록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당국들도 중국으로 가는 우회 수송을 단속하고 있다. 지난 2월 싱가포르 당국은 수백만 달러 어치 엔비디아 서버의 최종 목적지에 대해 거짓말을 한 혐의로 3명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부동산 서비스 업체 존스 랭 라살에 따르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의 데이터센터 용량은 거의 2000메가와트에 이른다. 이는 유럽 최대 데이터센터 시장인 런던과 프랑크푸르트를 합친 용량과 비슷하다.

올해 초 베이징에 있는 기술 업체 한 곳은 말레이시아 데이터센터가 원래 미국 클라우드 컴퓨팅 업체를 위해 마련했던 인공지능 서버 200대에 대한 임대권을 넘겨받았다고 업계 관계자들이 전했다.

◇ 미국 정부 대응책 한계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달 엔비디아와 기타 미국 업체들에 불필요한 규제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바이든 행정부가 제안했던 나라별 칩 구매 상한제를 없앤다고 밝혔다. 대신 미국 업체들이 고객이 미국산 인공지능 칩을 중국 인공지능 모델 훈련에 쓰는 것을 막는 조치를 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놨다.

엔비디아 대변인은 "전 세계 클라우드 서비스가 외국 경쟁업체가 아닌 미국 인프라에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국가 안보와 경제 안보를 높이고 미국이 전 세계 인공지능 표준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중동이 중국 인공지능 개발자들의 새로운 목적지로 떠오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방문 중 엔비디아는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에 수십만 개의 인공지능 칩을 파는 계약을 발표했다.

말레이시아에 있는 패밀리 오피스의 아담 우이 이사는 지난 1월 인공지능 서버 임대용 펀드에 500만 달러(68억 원)를 투자했다고 밝혔다. 그는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고 믿게 했고, 약속된 수익이 있는 사업이라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