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규칙 중심 질서 종말, '타격과 강압'의 패권 시대 도래"
동맹은 '거래' 수단일 뿐…확장억지 재설계하고 독자 생존 전략 세워야
동맹은 '거래' 수단일 뿐…확장억지 재설계하고 독자 생존 전략 세워야
이미지 확대보기질서를 관리하던 미국이 질서를 흔들기 시작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자신을 국제질서의 설계자이자 관리자라고 규정해 왔다. 규칙을 만들고, 동맹을 조직하며, 위기를 관리하는 역할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드러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안보 노선은 이 오래된 자기 규정에서 분명히 벗어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분석한 ‘타격과 강압(Strike and Coerce)’, 그리고 CNN이 정리한 이른바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은 단순한 전술 변화가 아니라 패권국이 질서를 다루는 방식 자체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노선의 핵심은 명확하다. 더 이상 장기적 안정, 규범의 내재화, 동맹의 합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짧고 강력한 군사적 타격과 그로 인한 공포를 통해 상대의 계산을 붕괴시키고, 정치적 양보를 강제한다. 이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관리자가 아니라, 힘의 우위를 가진 강대국이 영향권을 직접 집행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 변화는 미중 패권 경쟁의 성격을 바꾸고, 세계 질서의 작동 원리를 재편하며, 한국과 같은 중견국에게는 생존 전략의 전면 재설계를 요구한다.
‘타격과 강압’이 의미하는 패권 운용 방식의 전환
이 전략은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개입은 짧고 강력하다. 둘째, 점령이나 재건에는 관심이 없다. 셋째,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는 할 수 있고, 다시 할 수 있다.” 이 반복 가능성의 신호가 억지의 핵심이다.
이는 냉전 시기 미국이 소련과 관리했던 장기적 안정의 논리와도 다르고, 탈냉전 이후 자유주의 패권 전략과도 다르다. 오늘의 미국은 질서를 유지하기보다, 질서를 흔들 수 있는 능력 자체를 패권의 증거로 삼고 있다.
‘돈로 독트린’과 영향권 질서의 부활
CNN이 조명한 ‘돈로 독트린’은 이 전략의 이념적 외피다. 역사적 몬로 독트린은 유럽 열강의 개입을 차단하는 방어적 선언이었지만, 트럼프식 재해석은 방어가 아니라 집행에 가깝다.
이 독트린의 핵심은 단순하다. 미국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공간에서는, 규범이나 주권보다 미국의 의지와 힘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서반구에서 시작된 이 논리는 사실상 전 세계로 확장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지리적 범위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강도다.
이것은 자유주의 질서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세계관에서, 영향권이 중첩되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으로의 명백한 이동을 의미한다.
미중 패권 경쟁의 성격 변화: 관리 경쟁에서 강압 경쟁으로
이 노선 전환은 미중 패권 경쟁을 ‘장기 관리형 경쟁’에서 ‘고강도 강압 경쟁’으로 바꾼다. 이전까지 미중 경쟁은 기술, 공급망, 규범, 동맹을 중심으로 한 구조적 대결이었다. 충돌은 피하면서도 상대의 성장을 제약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타격과 강압’ 전략은 이 경쟁의 속도를 높이고, 불연속성을 키운다. 미국은 중국이 도달하기 전에 결정적 지점을 타격하거나, 중국의 계산 자체를 흔들려 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대만, 남중국해, 한반도, 중동에서 위기의 문턱을 낮춘다.
중국 역시 이에 대응해 억지력을 강화하고, 자신만의 영향권 논리를 더욱 노골적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두 강대국이 규칙을 통해 경쟁하는 공간이 아니라, 힘의 신호를 주고받는 위험한 무대로 이동한다.
세계 질서의 변화: 규칙 기반 질서에서 힘 기반 질서로
이 변화는 국제사회 전반에 세 가지 구조적 영향을 미친다.
첫째, 규칙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진다. 규범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언제 적용되고 언제 무시될지는 힘의 계산에 달린다.
둘째, 동맹의 성격이 바뀐다. 동맹은 공동 가치의 연합이 아니라, 특정 국면에서의 거래적 협력으로 변질된다.
셋째, 중견국과 소국의 전략 공간이 축소된다. 중립이나 모호성의 여지가 줄어들고, 선택 압박이 강화된다.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한반도는 관리 대상이 아니라 시험장이 된다
동아시아에서 이 변화는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미국에게 이 지역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이 가장 응축된 공간이다. 따라서 한반도는 더 이상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완충지대가 아니라, 미국의 강압 전략이 시험될 수 있는 전선이 된다.
이는 북한 문제의 성격도 바꾼다. 비핵화 협상, 관리된 억지, 단계적 접근보다는, 북한의 특정 행동에 대한 제한적이지만 충격적인 대응 가능성이 커진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이해가 자동으로 반영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국이 직면한 전략적 현실: 동맹만으로는 부족한 시대
이 질서 변화는 한국에게 불편한 진실을 던진다. 동맹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동맹만으로 안전이 보장되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의 안보를 자동으로 최우선시하지 않는다. 미국의 전략은 미국의 이해에 따라 작동한다.
이는 한국이 미국을 불신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국의 전략 변화에 맞춰 한국 스스로의 협상력과 억지력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의 5가지 대응 전략
첫째, 확장억지를 ‘재설계’해야 한다. 확장억지는 선언이 아니라 구조여야 한다.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을 정치적 수사로 받아들이는 데서 벗어나, 실제 작동 메커니즘을 구체화해야 한다. 위기 시 의사결정 구조, 핵 사용 조건, 재래식·핵 연계 억지의 단계가 명확해야 한다.
둘째, 조건부 자강 전략을 공식화해야 한다. 한국은 독자 핵무장을 즉각 선언할 필요는 없지만, 조건부 옵션으로서의 자강 전략을 공론화해야 한다. 이는 미국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카드다. 패권국은 스스로 선택지를 가진 동맹을 더 진지하게 대한다.
셋째, 한미일 협력을 억지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한미일 협력은 선언적 연대가 아니라, 중러북을 동시에 억지할 수 있는 구조적 메커니즘으로 발전해야 한다. 정보, 미사일 방어, 해양 통제, 핵·재래식 연계 억지가 결합된 형태여야 한다.
넷째, 아시아 다자 질서의 설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한국은 인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비교적 균형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국가들과 함께, 중러북의 강압적 질서에 대응하는 아시아형 다자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군사 동맹이 아니라, 전략적 완충지대를 형성하는 시도다.
다섯째, 한국 내부의 전략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국내다. 외교·안보 전략이 정권 교체마다 흔들리는 국가는 강대국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핵, 억지, 동맹, 대중 전략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적 합의가 필요하다.
힘의 시대, 전략 없는 도덕은 무력하다
트럼프 2기 미국의 ‘타격과 강압’ 전략과 ‘돈로 독트린’은 일시적 변덕이 아니다. 이는 패권국이 자신의 쇠퇴 가능성을 인식한 뒤 선택한 보다 거칠고 직접적인 생존 전략이다.
이 세계에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명확하다. 규칙에 기대는 국가가 아니라, 규칙이 무너질 때를 대비한 국가가 되어야 한다. 도덕을 말하되, 힘을 갖춰야 하고, 동맹을 중시하되, 스스로의 선택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생존은 더 이상 누구의 선의에 달려 있지 않다. 전략을 가진 국가만이 다음 질서의 설계자가 될 수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