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독설은 정치적 메시지, 유럽의 에너지 구조적 취약성은 엄연한 현실
러시아 의존·투자 공백·물류 병목… 넷제로 탓만 할 수 없는 3중 위기 구조
군사력 없는 에너지 안보 공허… 한국도 '미국 없는 시나리오' 점검해야
"스스로 싸워라"… 트럼프 발언의 두 얼굴
러시아 의존·투자 공백·물류 병목… 넷제로 탓만 할 수 없는 3중 위기 구조
군사력 없는 에너지 안보 공허… 한국도 '미국 없는 시나리오' 점검해야
"스스로 싸워라"… 트럼프 발언의 두 얼굴
이미지 확대보기그러나 이 발언을 곧이곧대로 '현실 진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트럼프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동맹의 비용 분담을 압박하는 정치적 메시지이자, 고립주의 노선을 국내 지지층에 각인시키는 대선 전략이기도 하다. 외교 전문가들은 "발언의 어조와 실제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별개"라며, "중동 에너지 항로의 안정은 미국 경제에도 직결된 사안"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셰일 혁명에도 불구하고 미국 역시 글로벌 유가 상승과 정제 설비 한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다만 트럼프의 비판이 정치적 포장을 걷어낸 뒤에도 유럽의 에너지 구조가 심각하게 취약하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핵심 쟁점은 '트럼프가 옳은가'가 아니라, '유럽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이다.
이미지 확대보기넷제로 탓이 아니다… 3중 충격이 겹쳤다
첫째, 러시아 의존의 급격한 붕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유럽연합(EU)은 천연가스 수입의 약 40%를 러시아에 의존했다. 에너지 전환의 '가교 연료'로 러시아산 가스를 활용하던 전략이 전쟁 발발과 함께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 충격이 현재 위기의 가장 큰 단층이다.
둘째, 화석연료 투자 공백(Underinvestment)이다.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ESG 압력에 따라 탐사·개발 투자를 급격히 줄이는 사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속도는 수요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다. 공급은 줄고 수요는 유지되는 구조적 불일치가 누적된 셈이다.
셋째, 물류 병목(Chokepoint) 리스크의 가시화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석유 교역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핵심 해상로다. 이 항로 하나의 차질이 항공유 공급 부족으로 직결되는 구조 자체가 유럽 공급망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를 종합하면 위기의 진짜 원인은 '넷제로'가 아니라, 전환 과정에서의 전략적 불일치다. 재생에너지로 가는 방향은 옳았을지라도, 그 속도와 순서, 대비 수준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횡재세' 연장을 자랑하는 영국… 위기 속 딜레마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지난달 31일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위한 긴급 가상 정상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는 "청정에너지 투자를 통해 상황을 안정시키겠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석유·가스 기업에 부과한 '횡재세' 연장 조치를 치적으로 내세웠다. 이는 기업의 자체적인 노력(기술 혁신 등)보다는 외부 환경의 급격한 변화나 정부 정책 등의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비정상적으로 높은 초과 이익에 대해 추가로 부과하는 세금으로, 주로 국제 유가 급등으로 이익을 본 정유사나 금리 상승기에 예대마진(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 은행권이 주요 대상이다.
WP는 이를 두고 "에너지 위기 한복판에서 북해 석유 추출의 수익성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자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의 딜레마는 유럽 전체의 정치적 딜레마를 압축한다. 법적으로 확약된 탄소중립 목표와 당장의 에너지 안보 사이에서 어느 쪽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위기 대응과 장기 전환이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단기 공급 안정을 위한 북해 재개발과 원전 유지, 장기 재생에너지 확장이 동시에 추진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프랑스는 원전을 중심으로 에너지 독립도가 상대적으로 높아, 같은 유럽 안에 분명한 온도 차가 있다.
에너지를 지킬 힘이 없다… 군사력 공백의 현실
에너지 공급망을 실제로 보호할 '하드 파워(군사력)'의 공백은 더 근본적인 문제다.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핵심 해상로를 독자적으로 방어할 능력이 유럽에 사실상 전무하다. 유럽은 독자적으로 호르무즈 해협 방어 작전을 수행할 해군 전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에서도 실질적 원거리 해상 작전 역량은 미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다.
이에 "지정학적 경쟁이 격화하는 세계에서 외교적 성명과 회의만으로는 물류의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금융권과 안보 전문가들 사이의 공통된 평가다.
리스크의 3중 구조, 단기·중기·장기 3단계 충격
이번 사태가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 미칠 파급은 시간대별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단기(2025~2026년)에는 호르무즈 해협 통행 차질이 이어질 경우 LNG 확보 경쟁이 심화되고 에너지 가격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된다. 항공유·난방유를 중심으로 유럽 소비자 물가에 즉각적인 상방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중기(2027~2030년)에는 원자력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는 기존 원전 수명 연장 및 신규 건설에 나서고 있으며, 독일에서도 탈원전 결정을 둘러싼 재논의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북해 석유·가스 재개발 가능성도 영국 내 정치 의제로 부상할 전망이다.
장기(2030년 이후)에는 에너지 공급망의 '블록화'가 가속화된다. 미국(LNG 수출), 중동(원유), 러시아(파이프라인), 중국(태양광·배터리 공급망) 등 에너지 진영이 분화되면서, 유럽은 어느 블록과 어떤 조건으로 에너지 연대를 맺을지를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한국도 '미국 없는 시나리오' 점검 시급
유럽의 위기는 한국에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 역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를 웃돌며, 중동산 원유 비중이 전체 수입의 약 70%에 달한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한국에도 즉각적인 공급 충격을 의미한다.
더 중요한 구조적 질문이 있다. 미국이 동아시아 안보 개입을 줄이거나 동맹 분담을 더 강하게 요구하는 시나리오에서, 한국의 에너지 공급로를 누가 지킬 것인가. 이는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경제 안보의 문제다.
국내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유럽 사태는 에너지 전환 속도와 공급망 안정이 동시에 설계돼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며 "한국은 재생에너지 전환과 함께 LNG 비축 능력 확대, 중동 외 공급선 다변화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에너지 안보 로드맵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현행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원전 유지 병행을 명시하고 있으나, 지정학적 공급망 충격에 대한 구체적인 비상 대응 시나리오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해외 자원 개발 투자 재활성화와 국가 비축유 기간 연장, 에너지 동맹 다변화 협정 등이 과제로 꼽힌다.
진단을 넘어 실천으로… 유럽이 바꿔야 할 3가지
유럽이 이번 사태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하나의 슬로건이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 전환이다.
첫째, 에너지 믹스 재설계다. 재생에너지 확장 기조를 유지하되, 원전·LNG·북해 자원을 전환 기간의 현실적 완충재로 공식 인정해야 한다. '화석연료 회귀'가 아니라 '전환 속도 현실화'다.
둘째, 하드 파워 재건의 병행이다. 에너지 공급로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해군력 재건이 필수다. 이는 단순한 방위비 증액이 아니라, 유럽이 에너지 안보를 외교적으로 협상할 수 있는 지렛대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셋째, 공급망 다변화의 가속화다. 중동 단일 의존에서 벗어나 북미 LNG, 아프리카 가스, 동지중해 자원 등으로 공급 다변화를 서둘러야 한다. 에너지 지형이 블록화될수록 선제적 파트너십 구축이 중요하다.
한편 시장 참여자들은 이번 유럽 에너지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가늠하려면 우선, 호르무즈 해협 통행 재개 여부를 지켜봐야 한다. 이란·이스라엘 긴장 완화 신호가 나오기 전까지 에너지 가격 불안은 지속될 수 있다. 미국의 중재 의지 강도가 변수다.
다음은 영국·독일 에너지 정책 변화다. 스타머 정부의 횡재세 조정 여부, 독일의 원전 재가동 논의 진전 여부가 유럽 에너지 방향을 가늠하는 선행 지표가 된다.
끝으로 LNG 현물 가격과 아시아 프리미엄을 살펴봐야 한다. 유럽이 LNG 확보 경쟁에 뛰어들면 한국·일본의 도입 비용이 동반 상승한다, TTF(네덜란드 천연가스 지수)와 JKM(아시아 LNG 지수)의 스프레드 확대 여부) 등을 주시해야 한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