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2조8300억달러 거래…건수는 줄었지만 100억달러 이상 초대형 인수 47건
이미지 확대보기전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이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규모로 불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란 전쟁과 그에 따른 시장 변동성에도 기업들이 초대형 거래에 나서면서 거래액이 급증했다. 특히 인공지능(AI) 확산이 기술기업뿐 아니라 전력, 산업재, 바이오, 미디어 기업의 전략적 결합을 자극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 자료를 인용해 올해 상반기 전 세계에서 발표된 M&A 규모가 2조8300억달러(약 4384조원)로 집계됐다고 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9% 늘어난 수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의 충격 이후 M&A가 급반등했던 2021년 상반기 2조7400억달러(약 4244조원)도 넘어섰다.
◇거래 건수 줄었지만 메가딜 폭증
올해 상반기 M&A 시장의 특징은 거래 건수보다 거래 규모다.
전체 거래 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 줄어 2020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100억달러(약 15조5000억원) 이상 초대형 거래가 47건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2% 증가한 것이다.
소규모 거래는 줄었지만 대형 거래가 전체 시장을 끌어올린 셈이다. 에너지 가격 변동성, 전쟁 리스크, AI로 인한 사업모델 불확실성 때문에 중소형 인수는 위축됐지만 이와 반대로 대기업 이사회는 산업 재편을 겨냥한 대형 결단에 나섰다.
기업들은 더 큰 규모와 더 넓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보해야 AI 시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시장이 대형 기업에 더 높은 평가를 주는 흐름도 초대형 거래를 부추기고 있다.
◇AI가 전력·기술 M&A 동시 자극
가장 강한 동력은 AI다.
AI 경쟁은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센터를 짓고, 전력을 공급하고, 냉각 장비와 통신망을 확충해야 하기 때문에 전력과 유틸리티, 산업재, 인프라 기업도 M&A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도미니언에너지와 넥스트에라에너지의 합병이다. 두 회사의 결합은 4200억달러(약 651조원) 규모의 미국 유틸리티 대기업을 탄생시키는 거래로 평가된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전력망과 발전 자산을 가진 기업의 전략적 가치가 커진 결과다.
기술 분야에서는 스페이스X가 AI 코딩 보조 스타트업 커서를 600억달러(약 92조9000억원) 규모의 전액 주식 거래로 인수한 것이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스페이스X 상장 직후 나온 이 거래는 AI 인재와 소프트웨어 역량 확보가 대형 M&A의 핵심 이유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AI는 기존 산업의 방어적 M&A도 자극하고 있다. AI에 의해 사업모델이 흔들릴 수 있는 기업들은 규모를 키우거나 새로운 기술 자산을 확보해 생존 전략을 짜고 있다.
◇기술·전력·산업재가 주도
업종별로는 기술 분야가 가장 활발했다. AI 모델, 클라우드 인프라, 데이터센터, 소프트웨어, 반도체 관련 자산을 둘러싼 경쟁이 이어지면서 기술 섹터가 M&A 시장의 중심에 섰다.
그 뒤를 에너지·전력, 산업재가 이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은 전력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고, 이는 유틸리티와 인프라 자산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산업재 기업들도 자동화와 전력 설비, 건설자재, 공급망 효율화 수요를 겨냥해 결합을 추진하고 있다.
미디어 분야에서도 대형 거래가 나왔다. 폭스가 스트리밍 하드웨어 업체 로쿠를 220억달러(약 34조1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대형 제약사들이 신약 후보 물질 확보를 위해 볼트온 인수에 나서고 있다.
볼트온 인수는 기존 사업에 붙여 시너지를 내기 위한 비교적 전략적인 추가 인수를 뜻한다. 대형 제약사들은 특허 만료와 신약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유망 바이오 기업을 사들이고 있다.
◇미국·유럽이 거래액 증가 주도
지역별로는 미국과 유럽이 시장을 이끌었다.
미국의 M&A 거래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7% 늘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독점 규제 완화 기조가 기업들의 대형 거래 추진 심리를 자극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들은 규제 심사 부담이 낮아진 시기를 활용해 그동안 미뤄온 대형 거래에 나서고 있다.
유럽의 거래액 증가율은 105%로 더 높았다. 다만 유럽은 이란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거래 건수는 14.2% 감소했다. 거래 수는 줄었지만 일부 대형 거래가 전체 금액을 끌어올린 구조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M&A 거래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4% 줄었다. 중국 경기 둔화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일부 국가의 규제 부담이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영국 상장사도 인수 표적
영국은 외국 기업들의 인수 대상으로 두드러졌다.
런던 증시에 상장된 기업들이 미국 동종 기업보다 낮게 평가된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해외 인수자들이 영국 기업을 겨냥하고 있다. 특히 산업재 기업들이 매력적인 인수 대상으로 꼽힌다.
영국 증시는 최근 몇 년 동안 기업가치 할인 논란에 시달려 왔다. 성장기업의 미국 상장 선호, 연기금의 국내 주식 비중 축소, 낮은 유동성 등이 겹치면서 런던 상장사의 밸류에이션이 미국 기업보다 낮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런 할인은 해외 기업과 사모펀드에는 인수 기회로 작용한다. 기업가치가 낮을 때 인수해 사업을 재편하거나 미국 시장 평가를 적용하면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모펀드 거래도 다시 살아나
사모펀드가 관여한 M&A도 회복세를 보였다.
올해 상반기 사모펀드 관련 거래액은 6010억달러(약 931조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4% 늘었다. 이는 사모펀드 업계가 보유 자산을 팔거나 새 투자처를 찾는 데 다시 속도를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모펀드 업계는 최근 몇 년 동안 고금리와 기업가치 조정으로 투자금 회수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대형 전략적 매수자와 증시 회복, 자금 조달 환경 개선이 맞물리면서 거래 창구가 다시 열리고 있다.
사모펀드 입장에서는 보유 자산을 매각해 투자자에게 자금을 돌려줘야 한다. 동시에 AI와 인프라, 헬스케어 같은 성장 분야에서는 새 인수 기회도 찾고 있다.
◇투자은행 수수료 잔치
M&A 급증은 투자은행에도 호재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상반기 1조달러(약 1549조원)가 넘는 거래를 자문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JP모건과 모건스탠리 등 다른 대형 투자은행도 메가딜 자문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대형 M&A는 자문 수수료 규모가 크다. 특히 100억달러 이상 거래는 법률, 회계, 자금 조달, 규제 대응, 주주 설득 과정이 복잡해 여러 투자은행과 로펌이 참여한다. 초대형 거래가 늘수록 월가의 수수료 수입도 커진다.
이는 IPO 시장 회복과 함께 투자은행 실적을 떠받치는 요인이다. 지난해까지 부진했던 자본시장 수수료가 올해 들어 M&A와 주식 발행을 중심으로 살아나고 있다.
◇규제완화와 AI가 만든 ‘행동의 시간’
올해 M&A 시장의 핵심은 기업 이사회가 관망보다 행동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AI는 기회이자 위협이다. 어떤 기업에는 새 성장동력이지만, 다른 기업에는 기존 사업을 무너뜨릴 충격이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AI 수혜 자산을 사들이거나, AI로 흔들릴 수 있는 사업을 방어하기 위해 규모 확대에 나서고 있다.
미국의 규제 완화도 이런 결정을 쉽게 만들고 있다. 반독점 심사 문턱이 낮아졌다는 인식은 대기업이 한 세대에 한 번 나올 만한 대형 거래를 검토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만 리스크도 적지 않다. 초대형 M&A는 통합 실패, 과도한 인수가격, 규제 지연, 주주 반발, 부채 부담을 동반한다. AI 관련 자산은 성장 기대가 큰 만큼 가격도 높다. 기대한 시너지가 실제 실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거래 이후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올해 M&A, 2027년까지 이어질까
시장에서는 이번 M&A 창구가 2027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기업들이 AI 전환과 공급망 재편, 에너지 수요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압박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금리와 시장 변동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전략적 필요가 불확실성을 압도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올해 상반기 M&A 시장은 단순한 회복을 넘어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다. 거래 건수는 줄었지만 초대형 거래가 급증했고, AI가 기술·전력·산업재·바이오·미디어를 동시에 흔들고 있다.
기업들은 더 커지거나, 더 빠르게 기술을 확보하거나, 더 명확한 사업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M&A 기록은 그런 압박이 실제 거래로 폭발한 결과다.
AI 시대의 M&A는 단순히 회사를 사고파는 문제가 아니란 지적이다. 어떤 기업이 다음 산업 질서에서 살아남을지를 가르는 재편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