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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LG 창업주 48주기, ‘인간존중’ 대들보… “위험 무릅쓰고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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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LG 창업주 48주기, ‘인간존중’ 대들보… “위험 무릅쓰고 독립운동 지원”

구인회 LG 창업주.
구인회 LG 창업주.
[글로벌이코노믹 유호승 기자] 구인회 LG 창업주는 1969년 12월 31일 눈을 감았다. 구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48년이 됐다. LG는 1970년 시무식을 구 창업주의 장례를 치른 이후인 1월 6일에 열기도 했다.

LG의 경영이념은 ‘고객가치 창조와 인간존중’이다. 구 창업주는 1931년 경남 진주에서 동생 고(故) 구철회 LG 창업 고문과 구인회상점이라는 포목상을 열었다. 구 창업주는 포목상을 열 당시 경영이념을 정했고, 이는 구자경 명예회장과 현 구본무 회장에 이르기까지 70년간 LG의 정신이자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구인회 창업주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우리나라 5대 기업 중 하나다. 구 창업주는 1942년 7월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의 독립운동 자금 부탁에 흔쾌히 당시 금액 1만원을 전달했다.

당시 안희제는 일본의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안희제에게 자금을 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구 창업주는 이를 무릅쓰고 지갑을 열었다.

구 창업주는 안희제에게 돈을 전하며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요청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말했다.

포목상과 운수업 등을 하던 구 창업주는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당시 ‘동동구리무’라고 불렸던 화장품 럭키크림을 시작으로 제조업을 시작했다.

구 창업주는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선 자본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기업을 키웠다.

구인회 창업주는 럭키크림의 성공을 발판 삼아 1952년 9월부터 플라스틱 빗을 생산한다. 이후 비닐원단과 플라스틱제품 제조시설을 대폭 확장하고 럭키치약을 출시했다. 1958년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해 전자제조업체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구 창업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부단한 연구개발’을 강조했다. 그의 연구개발과 개척정신은 LG의 70년 기업인생을 지탱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를 통해 LG는 화학·전자사업을 개척하며 국가경제 및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치약과 세탁기, 냉장고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제품을 개발해 ‘국민기업’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LG는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구본무 회장은 “구인회 회장 이래 많은 선배 경영자들과 임직원의 헌신으로 LG가 창립 70주년을 맞게 됐다”며 “국민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을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고객에게 더 큰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왔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편, 구인회 창업주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다. 이들은 동양방송을 공동 설립하고 사돈까지 맺은 막역한 사이다. 구 창업주와 이 창업주 간에 재미난 일화가 있다.

전자 사업을 놓고 보면 LG전자는 삼성전자 보다 10년 형이다. 구인회 창업주가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한 해는 1959년이다.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전자를 세운 것은 1969년이다. 후발주자로 설립될 삼성전자의 가장 큰 라이벌은 LG전자다. 이병철 창업주는 구인회 창업주가 마음에 걸렸다.

이들은 1968년 봄 안양 골프장에서 만났다. 이 창업주는 구 창업주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구 회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 산업을 해보려 하네”, 구 창업주는 이 말을 듣자마자 이 회장을 책망하는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동양방송 동업관계도 끝났다. 명실공히 LG와 삼성의 반세기 전쟁의 막이 오른 순간이다.


유호승 기자 yh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