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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연두와 초록 사이를 거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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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연두와 초록 사이를 거닐며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우물물에 설렁설렁 씻어 아삭 씹는/ 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옷깃에 쓱쓱 닦아 아사삭 깨물어 먹는/ 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연두/ 풋자두와 풋살구의 시큼시큼 풋풋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풋내가 나는 연두/ 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버드나무의 연두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누가 뭐래도 푸릇푸릇 초록으로 가는 연두/ 빈집 감나무의 떫은 연두/ 강변 미루나무의 시시껄렁한 연두…” -박성우의 ‘아직은 연두’ 일부 -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탓일까. 숲이 한결 싱싱해졌다. 꿈꾸는 듯 몽환적인 느낌에 휩싸여 있던 숲은 비가 한 번 스친 뒤로 연둣빛 생기로 가득 차서 출렁인다. 이상고온 현상으로 봄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화르르 피었다 지는 바람에 봄의 시간은 여지없이 짧아지고 말았지만, 숲에선 아직은 조용하나 끊임없이 설레는 연두의 시간이 이어지는 중이다. 점점홍으로 수를 놓는 진달래가 겨울빛을 채 지우지 못한 숲의 빈틈을 수를 놓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며 새순을 틔우는 숲길을 걷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숲은 연두에서 초록을 향해 내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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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새잎을 내는 귀룽나무의 연두가 숲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면, 실버들 가지에 어린 연두는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연둣빛 안개 같아서 가히 몽환적이다.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와 단풍나무들의 연두, 화살나무와 대왕참나무, 모과나무 같은 닮은 듯 다른 연두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봄을 한층 생기 넘치게 한다. 가로변의 은행나무들이 내어 단 손톱만 한 새잎에 햇살이 비치면 연두는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색이 된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면 나는 습관처럼 그 은은하면서도 밝게 빛나는 연두에 매료되어 넋 놓고 바라보다가 신호를 놓친 적도 있다.

‘완두콩 빛깔과 같이 연한 초록빛’이 ‘연두’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지만 연두는 그리 간단치 않은 색이다. 시인의 표현처럼 연두에선 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듯싶은가 하면, 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버드나무의 연두와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처럼 닮은 듯 각기 다른 느낌의 연두가 어우러져 겨울빛을 지우고 숲을 희망의 봄빛으로 채색한다. 아직 잎이 피지 않은 꽃나무 사이를 거닐며 화사한 봄빛에 취하는 것도 좋지만 서서히 연두로 물들어가는 숲을 바라보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즐거움이다. 연두는 슬픔을 모르는 철부지 같은 미완의 색이다. 하지만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희망의 색이라서 연둣빛 잎을 내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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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시간은 짧고 초록의 시간은 길다. 연두는 꽃의 시간과 초록의 시간 사이에 있다. 따라서 연두의 시간은 눈부신 꽃의 시간을 지나 성숙한 초록으로 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연두의 시간을 잘 보내야 초목들은 처음 꽃 피웠을 때 꿈꾸었던 튼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생각하면 모든 시간은 건너가는 것이다. 꽃의 시간에서, 연두의 시간으로, 다시 연두의 시간에서 초록의 시간, 그리고 단풍의 시간으로 건너간다. 물 흐르듯 끊임없이 흐르는 게 시간이지만 돌아보면 우리의 시간은 깨금발로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뛰기 일쑤다.
돌아보면 못내 아쉬운 시간이다. 누군가는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고 했다. 우리에겐 오늘, 지금의 시간이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안도현 시인은 어느 글에선가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고 썼다. 오늘은 다양한 생명의 빛을 간직한 연두와 오래오래 눈을 맞춰보자. 연두가 초록으로 짙어지기 전에.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