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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초록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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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초록에 물들다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드디어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벗어났다.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3년 4개월이나 걸렸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19로 고통을 받았지만 나는 요행히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딱히 증명할 순 없지만 내가 코로나의 긴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숲이 많은 도움을 준 듯하다. 마스크에 갇혀 사는 게 답답하기도 했지만 사람들과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는 탓에 틈이 날 때마다 나는 즐겨 숲을 찾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숲은 더 가까워졌고, 내게 숲을 찾는 일은 일상의 한 부분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봄에서 겨울까지 사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숲을 찾아 많은 위안을 받았다.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무와 풀, 꽃 그리고 다람쥐나 오색딱따구리 같은 들짐승·날짐승뿐만 아니라 작은 곤충들까지 다양한 생명이 사는 숲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찍이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서는 공부의 기본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제시했다. 격물이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여 깨쳐나가는 공부 과정이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직접 부딪쳐 체험하면서 궁리하는 과정이 격물이요, 치지는 그렇게 얻은 이치들을 자기 내면의 깊은 성찰로 올바른 앎에 도달하는 것이다. 책이 아닌 숲길을 직접 걸으며 마주쳤던 모든 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면 마스크에 갇혀 살았던 시간이 마냥 헛되다거나 억울하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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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오월을 신록의 계절이라고 한다. 어느새 숲은 신록(新綠)을 넘어 녹음이 짙어졌다. 옛사람이 일러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했던가. 우거진 숲 그늘과 향기로운 풀이 꽃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계절이 바로 요즘이다. 꽃의 아름다움은 잠깐이지만 연두에서 시작되어 신록을 지나 하루가 다르게 진초록으로 짙어지고 깊어진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색감은 체험된 신체 속에 있다”고 했다. 초록의 숲은 고향의 품처럼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그러고 보면 초록색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리움의 색소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다.

초록이 짙어지면 숲의 나무들은 화려한 색 대신에 흰색의 꽃들을 내어 달고 ‘녹의백상(綠衣白裳)’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바람결에 향긋한 향기를 풀어놓는 아카시아를 비롯하여 이팝나무·산사나무·층층나무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나무가 순백의 꽃으로 초록 위에 수를 놓고 있다. 그중에도 내가 좋아하는 꽃은 때죽나무꽃과 쪽동백꽃이다. 같은 과에 속하는 두 나무는 꽃만 얼핏 보면 같은 나무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때죽나무는 잎이 느티나무 잎보다도 작은 데 비해 쪽동백은 오동나무에 버금갈 만큼 잎이 큰 편에 속한다. 동백과 아무 상관도 없으면서 쪽동백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나무의 씨앗에 기름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옛날 아녀자들이 머리를 쪽 지을 때 '동백기름' 대용으로 써서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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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짙은 숲길에서 우연히 순백의 꽃을 발견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그 꽃들이 자아내는 은은한 향기는 감미롭기 그지없다. 잠시나마 꽃의 아름다움과 달콤한 향기에 취하는 시간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스티븐 헤이즈는 “행복(幸福)은 정상(正常)이 아니다”라고 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는 건 역설적으로 누구나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행복이 꽃이라면 우리의 일상은 초록의 숲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존 호머 밀스는 “삶이란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의 오만을 버리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고요히 초록에 물들 수 있다면 팍팍하던 삶은 유순해지고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사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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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