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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견적서 못 줍니다"...삼성·SK하이닉스 '신규 견적 발행 중단'에 전자업계 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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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견적서 못 줍니다"...삼성·SK하이닉스 '신규 견적 발행 중단'에 전자업계 공황

DDR5 한 달 새 7달러→15달러 '2배' 폭등…AI 블랙홀에 범용 메모리 씨말라
스마트폰·PC 제조사 "2025년은 지옥"…중저가 모델 단종·가격 인상 도미노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
전 세계 전자 제조 현장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한 달 만에 100% 넘게 폭등하는 기현상이 벌어지면서다. 급기야 글로벌 메모리 빅3(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가 신규 견적(Quotation) 발행을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인공지능(AI) 열풍이 고대역폭메모리(HBM)라는 '귀족 반도체'를 키우는 사이, 정작 서민 격인 '범용 메모리'의 생산 라인이 쪼그라들며 발생한 구조적 재앙이다.

7달러짜리가 한 달 만에 15달러…"부르는 게 값"


지난 28일(현지시각) 디지타임스 아시아 등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현재 메모리 현물 시장은 통제 불능 상태다. 가격 상승 곡선은 가파르다 못해 수직에 가깝다.

가장 충격적인 데이터는 DDR5 16기가비트(Gb) 칩 가격이다. 불과 한 달 전 7.68달러였던 칩이 현재 15.5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상승 폭이 무려 102%다. 구형 규격인 DDR4마저 재고가 바닥나며 가격이 90% 이상 치솟았다.

상황이 이렇자 공급자들은 아예 문을 걸어 잠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제조사들은 가격 변동성이 너무 커지자 일시적으로 신규 주문에 대한 견적서 발행을 중단했다. "오늘 가격이 내일이면 휴짓조각이 되는" 상황에서, 물량을 쥐고 있는 쪽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슈퍼 셀러 마켓(Super Seller Market)'이 도래한 것이다.

'세계의 공장' 중국의 비명…스마트폰 가격표가 바뀐다


충격파는 '세계의 공장' 중국을 강타했다. 광군제 대목이 끝났음에도 부품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1테라바이트(TB) SSD 가격은 500위안대에서 700위안(약 13만5000원)을 돌파하며 40% 뛰었다.

원가 압박을 견디지 못한 완제품 제조사들은 결국 소비자 가격 인상 버튼을 눌렀다. 샤오미, 오포(Oppo), 아너(Honor) 등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최근 중저가 모델 출고가를 100~300위안(약 2만~6만 원)씩 기습 인상했다. 마진이 박한 중저가폰은 부품값이 조금만 올라도 적자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트랜션 홀딩스(Transsion Holdings)의 순이익이 전년 대비 45% 급감한 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다. 업계에서는 "돈 없는 중소 제조사는 내년에 줄도산할 것"이라는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산업용 장비도 멈췄다…납기 무기한 연기


소비재보다 더 심각한 곳은 산업 현장이다. 24시간 멈추지 않아야 하는 키오스크, 공장 자동화 설비 등은 고신뢰성 '산업용 메모리'를 쓴다.

하지만 빅3 제조사들이 수익성 높은 HBM 생산에 집중하느라 산업용 메모리 생산 비중을 대폭 줄이면서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자재명세서(BOM) 내 메모리 원가 비중이 두 자릿수로 치솟았고, 메인보드 공급사들은 "부품이 없어 납기를 맞출 수 없다"며 두 손을 들었다. 삼성·SK하이닉스와 장기 공급 계약(LTA)을 맺지 못한 중소형 장비 업체들은 웃돈을 주고도 물건을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AI가 삼킨 D램…2026년까지 '보릿고개'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일시적 수급 불균형이 아닌,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지각변동'으로 진단한다. 원흉은 아이러니하게도 'AI'다.

AI 서버는 일반 서버보다 D램을 3~5배 더 많이 쓴다. 게다가 AI용 핵심 메모리인 HBM은 일반 D램보다 웨이퍼(Wafer) 면적을 더 많이 차지한다. 반도체 제조사 입장에선 한정된 생산 라인(Capa)을 수익성 높은 HBM용으로 돌리는 것이 이득이다. 결국 HBM 생산이 늘어날수록 일반 D램 생산은 줄어드는 '구축 효과(Crowding-out)'가 발생한다.

시장조사기관들은 이 '공급 절벽'이 AI 인프라 투자가 지속될 2026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2025년은 단순한 가격 상승을 넘어, 부품을 구하느냐 못 구하느냐가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최악의 해'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