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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 조선 위기와 한국 조선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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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 조선 위기와 한국 조선 전략

미 해군의 조선 위기와 한국 조선의 전략적 기회
동맹의 함대를 지탱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값싼 하청 기지에 머물 것인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한화필리조선소 모습이다. 사진=한화오션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한화필리조선소 모습이다. 사진=한화오션

지난 1940년대 구 소련과의 냉전 초기 미국의 냉전 전략을 주도했던 조지 케넌이 설계한 봉쇄 전략이 군사 동맹과 산업 전략을 함께 묶어냈듯이, 오늘날 미국의 해양 패권을 유지하려는 시도 역시 군함 숫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산업 기반의 문제다. 함대를 유지할 수 있는 조선 능력이 사라진 패권국은 시간이 갈수록 전략적 옵션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글은 2025년 12월 초 미국 블룸버그 통신이 분석한 미국 해군 조선 프로그램의 난항과 한국 조선소를 활용하자는 제안을 토대로, 한국의 조선 산업과 한·미 동맹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분석한 것이다.

미 해군 함대가 줄어드는 진짜 이유 – 배가 아니라 조선소가 없기 때문이다


미 해군은 장기적으로 함대 규모를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지만, 미국 내 조선소들은 인력과 부품과 설비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냉전 시기 상선과 군함을 함께 만들어 오던 산업 기반은 이미 해체되었고, 대형 상선 시장은 아시아에 넘어간 지 오래다.
케넌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의 승패는 당장의 전투보다 장기적 물자 동원 능력에서 갈린다. 지금 미국은 바로 그 물자 동원 능력, 즉 조선 능력에서 구조적 제약을 안고 있다. 군함 설계는 할 수 있지만, 이를 제때 찍어낼 조선 공장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후보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상선과 해양플랜트, 군함과 잠수함을 동시에 건조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고, 미 해군 지원함과 선박 정비 경험도 쌓아 왔다.

문제는 한국이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다. 생산 기지인가, 전략 파트너인가.

‘미국 조선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와 한국 조선의 딜레마


최근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는 한국 조선소를 활용해 미국 조선 능력을 보완하자는 구상이 논의되고 있다. 미국 의회가 법을 바꾸어 동맹국 조선소에서 미 해군 함정 건조와 정비를 허용한다면, 한국 조선 산업에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한국 조선소는 민간 상선 사이클의 변동에 덜 흔들리고, 안정적인 군 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값싼 노동력과 설비를 가진 해외 공장’의 지위를 의미한다면, 한국의 전략적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설계와 핵심 기술, 운용 개념과 유지보수 체계는 미국이 독점하고, 한국은 물량 생산에만 동원된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 조선 기술의 자율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또한 중국과의 관계도 변수다. 한국 조선소가 미 해군 핵심 전력을 대량 건조·정비하는 역할을 공식적으로 맡게 되면, 중국은 한국 조선을 공공연한 견제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무역·투자 전반에서 압박이 강화될 수 있다.

한국이 전략 설계자로 나서기 위한 세 가지 원칙


첫째, 한·미 해군 함정 협력을 단순 생산이 아니라 공동 설계와 운용 개념 공유까지 포함하는 구조로 설계해야 한다. 한국 해군이 실제로 쓸 함정과 미 해군이 쓸 함정을 같은 플랫폼에서 변형해 운용하는 모델을 만들 수 있다면, 한국은 단순 하청이 아니라 설계 파트너로 올라선다.

둘째, 조선·방산·해군·해양플랜트를 하나의 전략 생태계로 묶어야 한다. 한국 조선소는 상선과 군함을 번갈아 건조하며 숙련된 인력을 유지하고 있고, 방산 기업은 전투 체계와 무장을 공급한다. 여기에 해군과 해경이 운용 경험과 피드백을 제공하는 구조를 만들면, 한국은 해양 강국이자 전략 산업 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셋째,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관리할 수 있는 외교·경제 전략이 병행되어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경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한국이 동맹 함대의 조선 기반이 되는 순간, 중국은 이를 한반도 문제·경제 문제와 묶어 압박할 수 있다. 이를 완충할 에너지·공급망 다변화와 외교 다변화 전략이 필요하다.

미 해군의 조선 위기는 한국 조선의 수주 기회이자, 한국 외교의 시험대다.

케넌과 키신저가 강조했듯, 진정한 대전략은 단기 이익보다 힘의 균형과 장기 질서를 우선순위에 둔다. 한국이 이번 기회를 단순한 수주 증가로만 볼 것인지, 한·미 해양 전략 질서를 함께 설계하는 계기로 삼을 것인지는 앞으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