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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 후 왕실과 혼인이 정치엘리트로 가는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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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 후 왕실과 혼인이 정치엘리트로 가는 지름길"

[생생인터뷰]고려이후 정치엘리트 10년 연구 윤정석 교수

조선 登科 전주 李씨‧파평 尹씨‧안동 權씨‧남양 洪씨‧청주 韓씨 順


파평 윤씨 가문 왕건 때 族親된 후 조선조에는 중전‧후비 28명 배출


서울토박이 양반은 富축적대신 과거 통해 '가문의 영광' 대물림


▲윤정석중앙대명예교수
▲윤정석중앙대명예교수
[글로벌이코노믹=노정용기자] 고려시대 이후 정치엘리트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원로 정치학자가 10년 동안 추적해 과거 급제와 함께 왕실 또는 권력을 가진 집안과의 혼인이 정치엘리트가 되는 지름길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밝혀내 화제다.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과 중앙대 교수를 역임한 윤정석 중앙대 명예교수(78)가 그 주인공이다.

윤 교수는 서울에서만 23대째 살고 있는 파평 윤씨의 후예로 조선이 서울에 도읍한 지 600년을 기념한 1994년, 남산골 한옥촌에서 열린 타임캡슐 행사에서 서울 토박이 시민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당시 앞으로 400년 뒤에 서울 도읍 1000년이 되는 때 미래의 서울시민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직접 작성하고 이를 녹화하여 타임캡슐에 묻었다.

윤 교수는 당시 파평 윤씨가 서울에 얼마나 산 집안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족보를 꺼내어 벼슬한 조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후 10년 간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의 두 왕조가 나라를 운영하는 동안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경로로 권력엘리트로 충원되었는가를 추적했다. 특히 고려 초기에 왕건과 족친(族親)이 되고 군사적 세를 합쳐 민족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파평 윤씨의 씨족이 성장하여 권력의 핵심을 이루고 고려왕실 및 조선왕실과 혼인하여 족친(族親)이 됨으로써 집안이 크게 융성했던 것으로 분석했다. <편집자 주>

-가문을 일으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인가요?

“가문을 일으키는 데에는 역시 자손들의 교육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과거에 급제해야 하고 그 자손을 어떤 집과 결혼시키느냐, 그리고 어느 집에서 며느리를 들이느냐가 후손의 출세를 위한 관건이었어요. 파평 윤씨의 경우에도 사돈의 성씨를 분석해보면 본관으로 따져 50개가 넘지 않습니다. 사돈집을 엄선할 뿐만 아니라 자식을 잘 교육시켜 관직에 오르게 하면 자연히 상당한 귀족가문의 여식을 며느리로 들여올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족보에다가


실록 등 정사와 대조 10년 추적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4만649명

파평 尹 씨 사돈姓 50개 넘지 않아


-오늘의 정치는 민주화되어 있고, 권력이 대중화 되어 있는 이상 과거와 같이 씨족과 족친이 협력하여 권력기반을 유지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러한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가숙(家塾)과 같은 집안의 특별한 개인교육이 아직도 출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교육과 출세는 지금 21세기에도 집안과 가문을 융성하게 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다만 과거와 달리 인구의 팽창 탓에 그 영향력이 다소 줄어들었을 뿐이죠.”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한 분으로서 정치엘리트의 길을 걷지 않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과거를 통한 파평 윤씨의 역사에서 생각하면 당연히 제가 정부에 들어가 관료나 정치엘리트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에 더 많은 흥미와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입신출세를 위해 노력하거나 패당 짓는 것이 싫어서 그 길을 걷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불과 몇 만 명에 지나지 않을 정치‧관료엘리트 속에 끼어 꼭 무엇인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윤 교수는 조상들은 사대부의 자손으로 임금을 섬기고 나라 일을 열심히 하고 외적이 침입하면 전쟁터에 나가 무공을 세웠지만, 지금과 같이 많은 인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지역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과 더불어 지역갈등을 겪고 있는 게 정치‧관료엘리트가 되는 가장 큰 장애였다고 고백한다. 민족이 통일되고 국토가 하나되어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는 그날까지 파평 윤씨 가문은 자기 일에 충실한 생활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파평 윤씨는 몇 명이나 과거에 급제했나요?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총 4만649명으로 나타났어요. 그중 생원은 1만9675명이었는데, 왕족인 전주 이씨가 2712명(7.02%)이고, 파평 윤씨가 그 다음으로 많은 934명(2.42%)이었어요. 이어 안동 권씨 909명, 남양 홍씨 833명, 청주 한씨 763명이 각각 과거에 급제했지요. 특히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상을 지낸 조상은 여러 명이 되고, 임금의 중전이 된 사람은 8명, 왕의 후비를 지낸 파평 윤씨의 딸은 모두 28명이나 됩니다.”

-과거급제 한 사람을 추적할 수 있었던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일단 과거급제 한 사람의 명단이 ‘사마방목(司馬房目)’에 상세히 나오는데다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족보를 꼼꼼히 살펴보고 이를 다시 조선왕조실록의 정사와 대조하며 일일이 확인했지요. 일본식 호적제도는 3대만 내려가면 서로 연결이 안 되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한 족보를 통해 벼슬 내용은 물론, 친족 관계 전체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원래 호적은 고을 원이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갈 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단순한 기록에서 출발했으니 족보와는 다르지요.”

고려조 말에는 성씨 26개 불과


1840년대 들어 500여개로 늘어


사대부는 문관 지배 관료층 아닌


왕실과 결혼 작위 받은 양반 의미


-족보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원래 족보의 시작은 조상들에 관한 연대기적 기록입니다. 그런데 실용적 측면에서 보면 만일 족보가 없을 경우 조상의 이름을 후손이 쓰는 등 대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 항렬, 이름 가운데, 항렬은 세대를 말하므로,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으로 돌아가며 항렬을 택하게 됩니다. 물론 항렬은 족보를 관리하는 친족회의에서 정하지요. 사실 고려를 시작할 때는 여섯 개의 성씨 밖에 없었지만 고려가 끝날 무렵 스물여섯 개의 성씨로, 1600년대 쯤에는 100여개의 성씨로, 1840년대에는 500여개의 성씨로 늘어난 것도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어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족보가 집안의 항렬을 따지는 기준이 되는 것 이외에도 선조의 벼슬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조상의 산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족보에는 나와 있다. 말하자면 족보는 한 집안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죽고 난 다음까지, 즉 세대와 산소의 위치까지 기록해 놓았다.

“정치엘리트를 추적하면서 사대부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건 부수입이지요. 처음엔 사대부가 양반이 조상 4대의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줄 알았는데, 양반이 왕실과 결혼하고 나면 ‘○○대부’라는 작위가 주어져요. 양반으로서 대부의 작위를 받은 사람을 사대부라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백과사전을 보면 사대부를 단순히 지배 계층에 속하는 문관 관료층을 일컫는 말이라고 되어 있어요.

-10년 간 고려 이후 정치엘리트를 추적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얘들한테 우리 집안을 설명해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지요. 아들이 말을 안 듣길래 몽둥이를 들며 ‘우리 집안에 너 같은 놈 없어’라고 무심코 던진 말이 ‘그럼 우리 집안에 뭐가 있을까’라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했어요. 때마침 일본인 한국사 연구자인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가 재경(在京) 양반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고, 제가 연구를 하게 되면 재경 양반의 족보가 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이원종 서울시장 당시 정도 600주년 행사 때 서울토박이 대표로 뽑혔다면서요….

“1994년은 서울이 조선의 수도가 된 지 600년이 되는 해였어요. 서울시청에서 서울에서 4대 이상 산 서울토박이를 발굴한다고 해 23대째 서울에 살고 있으니 자료를 한번 제출해보자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서울시민대표가 되었고, 남산의 한옥촌에서 열린 행사에 시민대표로 참가해 메시지를 낭독하고 서울 토박이 사료와 물건 등을 타임캡슐에 담아 묻었어요.”

윤 교수가 작성한 서울 1000년 시민에 대한 메시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지금까지 600년을 살아온 서울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거대한 도시를 동경하고 아름다운 고장으로 꾸며 왔습니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 그리고 관악산이 이제 서울의 한 복판에 우뚝하게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그릇을 여는 순간에도 기상이 높은 수려한 자연과 함께 사시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1000년 고도의 시민 여러분! 어딘가 창조의 원동력이 꿈틀거렸던 서울에서 또 다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민족의 희망과 새로운 앞날을 설계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옛날에는 정략결혼을 하지 않으면 출세하기 힘들지 않았습니까?

“고려와 조선 시대 때 권력엘리트로 등장하는 과정을 조사해보면 첫째 과거에 붙어야 하고, 둘째 왕실이나 권력집안과 결혼해야 했어요. 그러니 정략결혼을 하지 않으면 출세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자녀를 결혼시킬 때 서로 집안을 보며 벼슬한 집안을 찾으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도 일정한 유형이 나타나요. 말로는 인재를 전국 경향 각지에서 뽑는다고 하지만 평양 개성 서울 원주 충주 공주 등 6개 도시에서 인재를 뽑아다 썼어요. 인재가 많이 나는 고장이어서 과거에 붙는 사람이 많은 것도 원인이지만 알게 모르게 그 지역 출신들이 이끌어주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그런 영향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재가 많이 나는 고장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일제 시대를 보면 일본인들은 뼈대 있는 가문이 벼슬에 나오지 못하도록 아예 도시를 뭉개버렸어요. 인재의 고장 원주를 죽이기 위해 춘천을 만들고, 부산을 죽이기 위해 마산을 만들고, 광주를 죽이기 위해 목포를 만들고, 이리를 죽이기 위해 군산을 만드는 식으로 인위적으로 유명 도시를 없애는 대신에 신도시를 건설했어요. 새 국토개발 전략에 따라 도시건설을 하면서 지역인재의 거점을 없애버린 것이지요. 1920년부터 1930년 사이에 춘천, 마산, 목포, 군산으로 가 성공한 새로운 사람이 많은데, 이 같은 역사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지금은 서울이 거대도시로 변했지만 옛날에는 3만4000명만 성내에 살았습니다.

“사대문 안에 산 3만4000명이 재경양반이고, 나머지는 서울 바깥에 살았는데 그중 60%가 노비들이었어요. 그들이 농사를 지어 사대문 안으로 가져와 서울토박이를 먹여 살렸고,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소작인으로 바뀌었어요. 특히 경복궁에서 일하던 관료들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세종마을에서 살았지요. 집도 그 크기가 대궐 같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19평 내외로 검소하게 살 수 밖에 없었어요. 관료를 대대로 하면서 재산을 모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경복궁에서 일하던 관료들은 정말 청렴하고 가난했어요. 대부분이 가산을 늘리지 말고, 권력을 탐하지 말고, 나라의 공복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으니까요. 출세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머리만 믿고 공부하여 벼슬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계동, 가회동, 경운동 등 북촌 마을에는 어떤 계층이 살았습니까?

“경복궁과 창경궁 사이에는 주로 사대부로서 왕실의 족친이나 종친이 살았어요. 또 남산 밑 한옥 마을은 과거에는 ‘남산골 샌님’이 사는 곳으로 나라의 과거시험에 붙지 못한 선비가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1910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그 지역을 개발하여 필동, 회현동, 충무로, 남산동 등 일본사람들의 주택지를 형성하였지요.”

서울‧평양‧개성‧원주‧충주‧공주


인재 충원 대부분 6개도시 집중


관료들 경복궁 인근 19평 내외 집


대부분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아


-조선시대의 마지막 벼슬아치라 할 조부(윤성희)의 삶도 가난했는지요?

“할아버지는 탁지부(현 재무부 세재관리 서기관)와 원주 세무서장, 양평군수 등을 지내셨는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비단으로 된 두루마기 겨울옷이 한 벌 밖에 없었다고 해요. 술을 드시고 집에 들어오시면 어머니께서 밤새 다려서 새옷 같이 만들어드렸다고 합니다.”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총독부는 윤 교수의 조부를 양평군수로 발령을 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조부는 3‧1만세운동 때 군수가 만세삼창을 했다는 이유로 파면을 당했다.

-조부가 ‘기호흥학회월보’ 제2호(1908년 9월)에 실은 ‘인색(吝嗇) 남비(濫費)를 이긴다’는 논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도를 넘쳐서 인색하게 구는 것과 지나치게 소비하는 것은 둘 다 경제의 본질적인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인색이 넘치도록 소비하는 것보다는 얼마간 덜 역기능을 한다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 낭비자가 많은 나라는 일시적으로 화려하고 번성하는 문명국이라고 인식하게 되고 인색가가 많은 나라는 보기에는 야만국과 같이 보이나 그러한 일시적인 문명국가는 개인적 파산이 속출하기 때문에 국가가 파산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어요.”

-조정에서 벼슬하는 동안 벼슬에서 쫓겨나는 등 우여곡절은 없었습니까?

“18대 할아버지 윤필상은 세조와 성종의 사랑을 받은 영상이었어요. 심지어 연산군에까지 벼슬을 하며 40여 년 동안 세 명의 임금을 보필했지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연산군에 의해 사사되고 온 집안이 적몰되는 위기를 겪었어요. 정부가 패가 갈려 다툼이 있으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때 대가 완전히 끊길 뻔했습니다. 연산군이 내리는 사약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 영상공은 권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하여 화려한 정치관료로서의 경력을 쌓았어요. 관직에 있는 동안 재산도 많이 모았고 자손도 많이 두었어요. 연산군 10년에는 갑자사화의 여파로 윤필상의 세 아들의 목을 베라는 전교가 내리게 되는데, 만일 후사를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파평 윤씨의 씨가 마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함께 100여 명이 죽었으니 그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요. 윤필상의 아들(윤숙)은 연산군에 의해 참수됐으나 사후에 중종에 의해 사면된 후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의 자리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윤백령, 윤형령, 윤광령, 윤원령에 의해 다시 집안이 이어지게 됩니다.”

파평 윤씨를 중전으로 맞은 중종은 윤숙을 사면복권 시킨 후 구파발에 묘지를 쓸 수 있도록 땅 4만평을 하사한다. 이로써 파평 윤씨 가문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묘지를 쓰게 되는데, 19대부터 33대까지 최근 온양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구파발에 묘지가 있었던 이유다.

“조선의 4대 부자 가운데 두 사람이 파평 윤씨였어요. 그런데 19대조 윤필상 이후로 집안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집안에서 벼슬을 하더라도 재산을 축적하지 말라고 묵시적으로 교육을 시켰으니까요.”

현대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와 같은 신분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과거급제와 정략적 결혼을 통한 신분상 양반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소위 ‘뼈대 있는’ 집안의 전통은 아직도 교육을 통해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노정용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