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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君子' 장계향, 도토리죽 쑤어 가난한 이웃을 구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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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君子' 장계향, 도토리죽 쑤어 가난한 이웃을 구휼하다

[한국종가의 철학을 찾아서(11)] 경북 영양 석계 이시명과 그의 부인 종택

시집와서 시아버지와 함께 병자호란에 굶주린 주민보살펴


"내가 이루지 않은 재산 상속 받을 수 없다" 맨몸으로 분가


분가후 도토리숲 만들어 빈민구제…아들은 '7賢者'로 키워


동아시아 최초로, 한글로 쓴 여성조리서 '음식디미방' 펴내

▲2013년4월정부표준영정(제91호)으로지정된장계향영정
▲2013년4월정부표준영정(제91호)으로지정된장계향영정
[글로벌이코노믹=김영조 문화전문기자] “백발 늙은이가 병들어 누웠는데/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보내네/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보내니/ 어느 달에나 돌아올 것인가?/백발 늙은이가 병을 지니고 있으니/서산에 지는 해처럼 생명이 위급하네/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서 하늘에 빌었으나/ 하늘은 어찌 그렇게도 반응이 없는고/백발 늙은이가 병을 무릎 쓰고 억지로 일어나니/ 일어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네/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아들이 옷자락을 끊고 떠난다면 어찌 할 것인가”

이 시는 조선시대 유일하게 여성군자로 불렸던 장계향 선생이 쓴 것으로 ‘백발노인의 딱한 사정을 대변하는 시(鶴髮詩)’라는 제목인데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에 있는 시다. 이런 시를 쓴 이는 과연 어떤 분일까? 종가의 철학을 취재하는 여행길 그 열한 번째로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의 석계 종가를 선택했다. 이 가문의 석계 이시명 선생도 훌륭했지만 석계 선생의 부인인 장계향(張桂香, 貞夫人 安東 張氏, 1598 ~ 1680) 선생 역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석계종택의종손이돈선생
▲석계종택의종손이돈선생
장계향 선생의 도토리죽 구휼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서둘러 두들마을로 향했다. 공간적으로 서울에서 5시간 넘게 걸려야 하는 먼 거리의 경북 영양이지만 시간적으로는 그 보다 더 먼 3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여행인 것이다. 그러나 석계 종택에 가서 이돈 (76) 종손을 만나는 순간 이 여행길이 먼 길이 아니라 내 가슴에 이미 따뜻하게 다가온 가까운 길이었음을 실감한다.

하얀 모시옷을 갖추고 기자를 맞은 이돈 어르신은 군자로서의 품격과 함께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포근한 내음을 풍기고 있다. 딱히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돈 어르신이 술술 풀어내는 장계향 선생의 철학에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다.

장계향 선생은 글씨도 잘 써서 선생이 쓴 초서체는 당대의 서예가인 정윤목도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평할 정도였는데 영특한 소녀였던 선생은 나이 열아홉 살에 석계 이시명과 혼인해 10남매(7남 3녀)를 훌륭히 키워냈는데, 아들 7형제는 학문이 뛰어나 칠현자(七賢者)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더욱 선생이 훌륭한 것은 석계 전처소생들도 차별 없이 훌륭한 인품으로 자라게 했다는 것이다.
▲늙은이의딱한사정을표현한장계향의시'학발시'
▲늙은이의딱한사정을표현한장계향의시'학발시'
장계향 선생이 혼인할 당시 시집 충효당은 갑자기 들이닥친 석계의 두 형 청계와 우계의 죽음으로 충격과 비탄에 잠겨 집안의 분위기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큰 동서 무안 박씨는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 순절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잇따라 아들을 앞세운 참사로 집안일에 뜻을 잃은 시어머니를 대신해 젊은 안주인으로서 모든 역할과 책임을 지고 가정을 지탱했다.

특히 선생은 석계 전처소생인 여섯 살 배기 상일을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남경훈 선생 집으로 매일 업고 다녔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 같은 새 며느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아버지 이함은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아 돌아온 것”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생은 3남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숙종 임금으로부터 정부인 품계를 받아 ‘정부인 안동장씨’로 불렸다.
그러나 선생의 가장 큰 공덕은 역시 구휼이었다. 선생은 처음 영덕군으로 시집을 갔는데 이때 시집은 큰 부자였다. 당시 주위에는 병자호란 등의 난리와 흉년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그런 처참함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선생의 시아버지는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자 장 선생이 시집을 온 뒤 이 구휼사업은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해마다 6000석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내놓았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뜻이 맞는 철학을 가진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훌륭한 합작이었다. 이때 선생은 곡식을 나눠주면서 “나는 시아버님의 심부름을 할 뿐입니다. 더 많이 못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큰 모범이었다. 그런데 6000석을 푼 뒤 더는 나눠줄 곡식이 없자 집안에 일하는 사람을 모두 풀어 도토리를 주워오게 했고, 이를 죽으로 쑤어 1~2달 동안 하루 300여 명씩을 먹여 살렸다.

더욱 장계향 선생이 돋보이는 것은 시아버지의 죽음 이후 남편과 함께 석보면으로 분가를 했는데 이때 상속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가해 나오면서 시댁 어른들이 오랫동안 이루어놓은 재산을 가지고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댁 재산은 남편과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여겼고 그러한 마음은 이내 실천으로 옮겨졌다. 요즘 재벌가들이 상속을 위해 온갖 추악한 짓을 저지르는 모습에 견줄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성인군자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계향 같은 분이 성인군자요, 그러한 아내의 뜻을 따른 석계 선생 역시 군자 중에 군자였던 것이다.

두들마을로 분가한 장 선생은 먼저 집 주변에 도토리나무 숲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거둬들인 도토리로 죽을 쑤어 가난한 이를 구휼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지금도 석계 종택 아래 마을에는 그때 심은 도토리나무들이 즐비하다. 도토리나무를 둘러보며 더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낙기대(樂飢臺)’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곳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도토리죽을 나눠주었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낙기대일까? ‘낙기대(樂飢臺)’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배고픔을 즐긴다.’라는 말이다.

▲'배고픔을즐긴다'는뜻의낙기대.
▲'배고픔을즐긴다'는뜻의낙기대.
▲장계향선생이가난한이들에게죽을쑤어주려고심은도토리나무숲.
▲장계향선생이가난한이들에게죽을쑤어주려고심은도토리나무숲.
당연히 받을 수 있는 상속을 포기하고 두들마을로 들어온 선생은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뜻에서 ‘낙기대’를 고집하셨던 것이다. 아예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가난과 더불어 살겠다는 각오였던 것이다.

두들마을에는 선생이 살았던 종택이 있다. 이 집은 기와집이지만 원래는 초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 그만큼 정부인 장계향 선생은 검소하게 살며 하나라도 더 이웃에게 베풀려고 온 정성을 쏟았던 분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더욱 장계향 선생이 돋보이는 것은 동아시아 최초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썼다는 것이다. 《음식디미방》은 예부터 전해오거나 선생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 등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가루음식 조리법과 떡 빚기 그리고 어육류, 각종 술 담그기도 자세히 기록해두었는데 특히 146가지 음식의 요리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본격 요리서로서 3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을 따라서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용적이다.

▲《음식디미방》첫장(왼쪽)과'규곤시의방'이라쓰인표지.책의격을높이기위해남편석계선생이써주었다.
▲《음식디미방》첫장(왼쪽)과'규곤시의방'이라쓰인표지.책의격을높이기위해남편석계선생이써주었다.
요리는 식품화학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하는 과학의 영역이라고 한다. 특히 요리 전문가들이 평하길 《음식디미방》은 조선시대 중기 요리과학의 수준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책이며, 상당히 과학적인 조리법에 따라 씌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이 소개한 주요 음식들을 보면 석류탕, 연근채, 대구껍질누르미, 꿩지히, 상화편, 빙사과 등 요즈음 들어보지 못하는 음식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밖에도 이 책의 특징은 《음식디미방 주해》를 쓴 경북대 백두현 교수에 따르면 17세기 국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어서 당시의 한국어, 특히 경상북도 북부 방언의 음운, 문법, 어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현재 경상북도와 영양군에서는 <음식디미방보존회>를 만들어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음식을 복원해서 널리 알리려 노력하고 있다.

종부 조귀분 선생은 뵙지 못했다. 종손은 말한다. “요즘 아내는 나보다 더 유명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바쁩니다.” 질투가 아니라 뿌듯함이 배어있는 말이었다. 340여 년 전 석계 선생과 장계향 선생이 함께 철학을 펼쳤던 것과 같은 모습일까? 석계 종택 들머리에는 《음식디미방》체험관이 있다. 장계향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귀중한 음식을 종부 조귀분 선생으로부터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여군자장계향예절관
▲여군자장계향예절관
종손 이돈 선생은 장계향 할머니의 흔적을 남기려 평생을 바쳐 수많은 책을 쓰고 또 쓴다. “할머니께서 쓰신 《음식디미방》은 물론 할머니께서 하신 행적과 철학을 널리 알려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도록 남은 삶을 바칠 생각입니다.” 역시 그 할머니에 그 손자다운 모습이다.

언론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얘기할 때 미국의 워런 버핏을, 자녀교육을 얘기할 때 중국 맹자를 흔히 예로 든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자녀교육에 관한 한 워런 버핏이나 맹자보다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훌륭한 장계향 선생이 바로 우리곁에 있기 때문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는 낙기대 앞에서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장계향 선생처럼 배고픔을 즐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