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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한·미 관세-투자 협상 어떻게?…"1997년 외환위기 재현"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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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한·미 관세-투자 협상 어떻게?…"1997년 외환위기 재현" 우려도

조지아 한국인 구금사태에 비자 문제까지 겹쳐 대미 경제외교 위기론 나와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한국과 미국이 3500억 달러(49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 조성을 둘러싼 협상이 여전히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9일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3500억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어떻게 조달해 운영하느냐 문제 때문에 협상이 상당히 막힌 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지난 9월 초 조지아 합작 공장한국인 구금사태까지 겹치면서 한국의 대미 경제외교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의 '전액 현금투자' 요구에 한국 "감당 못한다"


보도에 따르면, 양국 협상의 핵심 쟁점은 펀드 운영 방식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한국이 3500억 달러 전액을 미국 정부가 설립한 특수목적법인에 현금으로 투자하고, 투자금 사용처는 미국이 결정하며, 수익금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유럽연합(EU) 모델처럼 대출보증과 융자 위주로 구성하되, 직접 지분 참여는 5% 이하로 제한하기를 원한다고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워싱턴 주한국대사관 브리핑에서 밝혔다. 김 장관은 "직접투자 비율은 높지 않을 것이고, 대부분이 대출과 보증으로 본다""수출입은행이나 무역보험공사가 하는 보증이 대출보다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트닉 장관은 지난 11일 미국 CNBC 방송에서 "유연함은 없다. 한국은 그 협정을 받아들이거나 관세를 내야 한다"며 압박했다. 이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맞섰다.

일본과의 격차와 한국의 딜레마


일본이 먼저 5500억 달러(77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에 합의한 상황이 한국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일본은 지난 4일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서명으로 협정을 공식화했다.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한국의 부담이 더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의 5500억 달러 투자는 2024년 기준 일본 국내총생산(GDP·47000억 달러)12%에 해당하는 반면, 한국의 3500억 달러는 한국 GDP(18600억 달러)19%에 이른다고 업계에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외환보유액 대비 투자 규모에서 격차가 벌어진다. 2024년 기준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2300억 달러로 투자 금액이 보유액의 약 45%인 반면, 한국의 외환보유액(4156억 달러) 대비로는 약 84%에 이른다고 금융 당국이 산출했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최근 보도에서 "한미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체결되지 않으면 투자액의 상당 부분을 한국은행 외환보유고에서 충당해야 한다""외환보유고가 4000억 달러 아래로 줄어들면 외환시장 공격, 환율 변동성 확대 등 여러 부정적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티은행 "두 가지 시나리오, 부분 타협 가능성 높아"


시티은행이 최근 분석한 3500억 달러 한국 대미 투자펀드 관련 보고서는 현재 상황을 두 가지 시나리오로 나눠 전망했다.

첫 번째는 장기간의 막힌 상태 끝에 양국이 부분적 타협에 이르는 경우다. 시티는 "양측 모두 극단적인 관계 파탄을 피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한국으로서는 최대 교역국이자 안보 동맹인 미국과의 정면충돌이 엄청난 경제적, 외교적 부담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두 번째는 미국이 경제적 압박을 극대화해 한국에 25% 또는 그 이상의 상호관세 및 자동차 부문 관세를 부과하는 경우다. 시티는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투자 협상을 받아들일 경우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내다봤다.

현실적 제약도 만만치 않다. 3500억 달러는 한국의 최근 5년간 전 세계 해외직접투자 총액(3489억 달러)보다 큰 규모이며, 35년간 순 해외투자 누적액과 맞먹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한국이 해마다 대미 투자에 동원할 수 있는 현실적 금액은 200-300억 달러 수준으로, 트럼프 임기 내 완전 이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시티는 현실적 절충안으로 조선협력펀드 1500억 달러만 한국이 주도하고, 나머지 2000억 달러는 프로젝트별로 단계적 지원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부 내부에서는 불합리한 조건 수용보다 25% 상호관세를 당분간 감수하는 방안도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지아 구금사태로 비자 문제까지 해결해야


지난달 4일 조지아주 엘라벨에 있는 현대차-LG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단속이 협상에 추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국토안보부가 475명을 구금했는데, 이 중 300여 명이 한국인 엔지니어와 기술자였다.

한국 주요 기업 14곳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57.1%가 진행 중인 미국 프로젝트 조정을 검토한다고 답했으며, 64.3%는 관광사증면제프로그램(ESTA)이나 B-1 사증을 통한 출장을 중단하거나 제한했다고 업계 관계자들이 전했다. 투자 비용 증가는 최소 10%에서 최대 30%까지 예상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현재 한미 양국은 사증 제도 개선을 위한 실무협의체를 구성해 논의 중이나, 한국이 요구하는 E-4 사증 신설은 의회 승인이 필요한 사안이어서 2026년 이후나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외교부 관계자가 전했다.

"1997년 외환위기 재현될 수도" 우려까지 나와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2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통화스와프 없이 3500억 달러를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며 강한 우려를 표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4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을 만나 무역 협상이 상호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진전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한국이 원화 표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 뒤 달러로 바꿔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환율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한국이 해마다 외화 조달 가능 규모는 200-300억 달러(28~42조 원) 수준으로, 3500억 달러는 10년 이상이 걸리는 천문학적 금액이라고 금융 전문가들이 분석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통화스와프 거부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일본은 기존 스와프라인을 보유하고 있으나, 한국은 코로나19 때 잠시 운영했던 600억 달러(84조 원) 규모 스와프도 종료된 상태다.

금융시장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코스피는 최근 3460을 오가며 45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으나, -달러 환율은 1400원대까지 올라 20093월 이후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다고 한국거래소가 발표했다.

한미 양국은 1031-111일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전까지 협의를 마무리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현재 상황으로는 협상 장기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무역 협정과 비자 문제를 둘러싼 협상이 지연될 경우, 10월 트럼프 대통령이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때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또 다른 만남이 어색해질 수도 있다.

한·미 경제협상 난항이 장기화하면서 국내는 물론 국제 금융시장에서도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어 정부의 돌파구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