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봉쇄 3개월 땐 제조업 원가 11.8% 급등…석유화학·화학업계 직격
카타르에너지 "한국 장기계약 불가항력 선언 가능"…현물시장 수급 전쟁 시작
카타르에너지 "한국 장기계약 불가항력 선언 가능"…현물시장 수급 전쟁 시작
이미지 확대보기카타르에너지가 한국과 맺은 LNG 장기공급 계약에 최장 5년간 '불가항력'을 선언할 수 있다고 공식화하면서, 중동 전쟁 3주 만에 한국의 에너지 안보와 산업 전반에 전례 없는 충격파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19일(현지시각) 이란의 드론 공격으로 카타르 세계 최대 LNG 생산 기지 라스라판이 30년 만에 가동을 멈추고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이 붕괴 직전에 놓였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도 같은 날 카타르에너지 사드 알카아비 최고경영자의 말을 인용해 "한국·중국·이탈리아·벨기에로 향하는 LNG 장기 공급 계약에 대해 최장 5년간 불가항력을 선언해야 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수십 년째 반복되는 중동 에너지 위기 앞에서, 화석연료 수입 의존 구조를 고수해 온 한국의 에너지 조달 체계가 이번에도 민낯을 드러냈다.
반세기 최대 LNG 공급 절벽…글로벌 시장 '도미노 붕괴’
카타르 라스라판 복합단지는 이달 초 이란의 드론 공격으로 30년 만에 처음으로 가동이 중단됐다. 이스라엘의 이란 사우스파스 가스전 타격에 대한 보복 공습이 추가로 이어지면서 단지 전체가 카타르 측이 '대규모 피해'로 규정한 상태에 놓였다.
블룸버그통신은 "이 공장이 하루를 멈출 때마다 세계는 시드니 전체 가정이 1년간 쓸 에너지에 해당하는 물량을 잃는다"고 보도했다.
알카아비 최고경영자는 "LNG 생산 설비 14개 중 2개와 가스 액화 시설 2개 중 1개가 손상됐다"며 "이번 피해로 연간 1280만t의 LNG 생산이 3~5년 동안 중단될 것"이라고 밝혔다.
모건스탠리는 이번 공급 중단이 1개월을 넘길 경우 글로벌 LNG 시장에 즉각 수급 적자가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3개월 이상 지속되면 LNG 산업 반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공급 차질로 기록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에너지 분석 업체 MST마르케의 사울 카보닉 애널리스트는 "우리는 지금 가스 위기의 최악 시나리오로 치닫고 있다"며 "전쟁이 끝나더라도 LNG 공급 차질은 피해 복구 기간에 따라 수개월에서 수년간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는 미국을 중심으로 LNG 공급이 큰 폭으로 늘어 글로벌 공급 과잉이 예상됐던 해였다. 그러나 중동발 공급 충격이 겹치면서 수급 균형은 급격히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에는 공급 경로가 바뀌었을 뿐 생산 자체가 멈추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세계 LNG 공급량의 약 20%를 담당하는 생산 거점 자체가 멈춘 상황이어서, 대체 경로를 찾을 여지가 훨씬 좁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시아 신흥국 직격탄…파키스탄 4월 전력난 임박
카타르 LNG의 5분의 4를 사들이는 아시아 신흥국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고 있다. 카타르산 LNG 수입의 99%를 카타르에 의존하는 파키스탄은 정부 당국이 4월 중순부터 전력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공개 경고했다.
파키스탄 최대 수출 품목인 섬유 산업도 이중고를 맞았다. 공장 내 전력 생산과 가공 공정 모두 가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펀자브주 직물 사업자 아미르 셰이크는 블룸버그에 "생산이 줄면 수출도 준다.
비용 상승으로 남은 수출 경쟁력마저 떨어질 것"이라며 "업계 전체가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 LNG 시장 정보업체 아이시스(ICIS)의 에반 탄 애널리스트는 "이제 가스값이 얼마나 오를지를 보는 게 아니라, 남아시아 구매자들이 어느 가격대에서 현물시장에서 완전히 이탈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과 필리핀은 가격이 안정될 때까지 추가 구매를 사실상 중단했고, 인도 기업들은 수년 만에 가장 비싼 값에 LNG를 사들이고 있다. 필리핀은 인도네시아와 석탄 추가 확보 협상에 나섰고, 인도는 이번 여름 역대 최대 석탄 발전을 예고했다.
에너지 전환의 '가교 연료'를 자처했던 LNG가 오히려 석탄 의존도를 높이는 역설이 빚어지고 있다.
현물시장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LNG 단일 선적 비용은 현재 약 8000만 달러(약 1190억 원)로, 이번 사태 이전 대비 두 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2022년 유럽발 에너지 위기 당시에는 아시아로 향하던 선박이 유럽으로 항로를 틀어 아시아가 간접 피해를 입었다면, 이번에는 카타르 LNG의 최대 수요처인 아시아가 충격을 정면으로 흡수하고 있다.
유럽·일본도 비상…미국·러시아는 반사이익
에너지 조사 업체 라이스타드에너지는 카타르발 공급 중단이 6개월간 이어질 경우 유럽과 아시아 선진국도 동절기 비축을 앞두고 소비 감축 압박에 시달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글로벌 원자재·파생상품 리서치 총괄 프란시스코 블란치는 "앞으로 2~3개월 안에 유럽이 동절기 비축을 시작할 때 압박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2년 에너지 위기 이후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고 LNG 수입 터미널을 늘리며 공급 다변화에 나섰지만, 세계 LNG 공급량의 20%를 담당하는 라스라판의 생산 중단이라는 충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 최대 LNG 수입사 제라(Jera)의 유키오 카니 최고경영자는 지난 주말 도쿄에서 열린 업계 콘퍼런스에서 "이번 사태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버금가는 위기"라고 진단했다.
반면 미국은 반사이익을 누리는 모양새다. 벤처 글로벌(Venture Global)의 마이클 사벨 최고경영자는 "미국과 카타르가 핵심 공급국이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공급 여력이 있고 추가 물량도 천천히 시장에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도 중국으로의 LNG 수출을 꾸준히 늘려온 터라 또 다른 수혜국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제가스연맹(IGU) 사무총장 메넬라오스 이드레오스는 "가격이 급등하면 여유가 있는 나라들은 계속 살 수 있지만 여유가 없는 나라들은 밀려난다"며 "호르무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물량을 대체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 직격…제조업 원가 폭등·전기요금 인상 '이중 충격’
이번 사태는 한국 산업 전반에 복합 충격으로 번지고 있다. 한국은 연간 900만~1000만t의 LNG를 카타르에서 수입하고 있고, 이는 전체 LNG 수입량의 25~30%를 차지한다.
중동 원유 도입 비중이 전체의 69.1%에 달하며, 이 중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난다. 산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봉쇄가 3개월 이상 이어질 경우 제조업 생산비는 최대 11.8%까지 치솟고, 화학제품(14.84%)·비금속광물제품(12.09%)·1차 금속 및 운송서비스(8.92%) 순으로 피해가 집중된다.
한국가스공사가 도입 원가 상승분을 요금에 반영할 경우 도시가스와 전기요금의 동시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미 산업용 전기요금은 2022년부터 2024년까지 7차례 인상되며 약 70% 올랐고 가스요금도 38.5% 인상된 상태여서, 추가 인상이 단행될 경우 제조업 원가 부담과 물가 상승이 맞물리는 복합 충격이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반면 조선업계는 LNG 및 대체 에너지 운반선 수요 증가라는 기회를 주목하고 있으며, 대형 조선 3사의 주가는 군사 작전 발발 이후에도 견조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한국수출입은행 공급망기금 비상대응반을 가동하고 중동 외 지역 원유 구매자금 지원 한도를 기존 90%에서 100%로 높이는 등 단기 방어에 나섰다.
한국가스공사가 지난해 8월 2028년부터 10년간 미국산 LNG를 연간 330만t 추가 도입하는 장기계약을 체결해 놓은 점은 중장기적 완충 요인으로 꼽힌다.
에너지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사태가 진정된 뒤에도 전력망·재생에너지·청정산업 분야로의 자본 재배치 없이는 다음 위기의 충격이 지금보다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